우회 수출 막혀 퇴로 없는 진퇴양난 상황
美 투자 확대 시 비용·리스크 종합 고려해야
CPTTP 가입 등 새로운 수출 시장 개척 필요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관세 부과 현실화로 반도체, 자동차 등 대미 수출 의존도가 높은 기업들의 타격이 불가피하지만 뚜렷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즉, ‘퇴로’가 없다는 것. 국내기업의 해외 주력 생산기지인 동남아 국가 등에도 고율 관세가 부과되면서 수출 우회로도 막힌 상황이다. 관세를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미국 현지에서 생산하는 것이지만 생산기지 구축에는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드는 데다 모든 기업이 미국에 생산기지를 구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다만 이 같은 보호무역주의가 앞으로 국제 무역의 ‘뉴노멀’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큰 만큼 기업들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공급망을 재편하고 전략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미국 수출 의존도를 줄이고 새로운 시장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고도 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9일 “미국발 관세 전쟁은 한국 대기업의 수출 중심 구조에 큰 부담이 될 것”이라며 “이에 따른 공급망 재편과 글로벌 전략 수정이 불가피한 시점”이라고 설명했다.
백제흠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이번 미국의 상호관세 조치는 일시적인 통상 압박이 아니라 미·중 전략 경쟁과 그에 따른 공급망 재편 흐름 속에서 등장한 구조적 변화의 일부”라면서 “단기 대응을 넘어 기업 전반의 공급망 전략을 재정립하고 관세 리스크를 사전에 분산·관리하는 새로운 해법인 필요한 시점”이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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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시급한 과제가 공급망 재편이다. 전문가들은 생산지를 조정하거나 수출국에 변화를 주는 수준이 아니라 원자재와 부품 조달, 생산과 물류 등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공급망 재편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백 변호사는 “우리 기업이 베트남, 인도 등에 보유한 제조기지가 국가별 개별관세 대상국에 포함돼있기 때문에 이러한 국가를 통한 미국 수출과 관련해 공급망 재편이 불가피하다”며 “상호관세 기준이 국가별로 다르게 적용되는 만큼 단순 수출 대상국이 아닌 글로벌 조달·생산·물류의 흐름 전체까지 고려한 공급망 전략이 요구된다”고 제안했다.
김형주 LG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상호관세가 미국의 최종 목표가 아닐 가능성에 대비해야 하는 동시에 이번 조치가 다른 나라의 통상정책에 가져올 변화에도 주목해야 한다”면서 “그동안 글로벌 생산 분업을 주도한 기업들이 비용 산정 시 고려해야 할 요소가 많아지고 복잡해져 경영 전략을 상당 부분 수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전문가들은 상호관세가 국가별로 다르게 부과된 만큼 관세 영향을 최소화할 방안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상대적으로 관세 타격이 적은 국가로 생산지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는 “당장 미국에 생산 공장을 짓는 등의 변화를 주기 힘들다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곳에서 생산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며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물량 절반가량을 베트남에서 생산하는데, 베트남에 46%의 관세율이 부과된 만큼 국내 생산을 늘리는 게 경쟁력을 확보하는 방법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대종 교수는 “국가별 관세정책과 무역협정 체계를 면밀히 분석해 무역 경로를 재구성하거나 수출 전략을 분산시켜야 한다”면서 “미국·멕시코·캐나다 무역협정(USMCA)이 적용되는 상품에 대해선 여전히 무관세가 적용되고 있는 만큼 이들 국가를 활용한 우회 수출 전략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짚었다.

국내 여러 기업이 관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미국 현지 투자를 확대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엇갈린 평가가 나왔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가 4년밖에 남지 않은 데다 관세와 관련해 미국 내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높은 만큼 섣불리 현지 투자를 확대해선 안 된다는 의견이 나온다.
정민정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관세의 불확실성 해소를 위해 많은 기업이 미국 현지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데 관세의 예상 유효기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리스크가 크다”고 지적했다.
한편에서는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기조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선제적으로 현지 생산기지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다만 현지생산 확대에는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들 뿐만 아니라 향후 정책 변화 등에 따른 리스크가 있는 만큼 실익을 종합적으로 따져서 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김용진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 이후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미국 우선주의, 미국 내 제조업 경쟁력 강화라는 목표 자체를 버리진 않을 것”이라고 전제한 뒤 “장기적으로 미국 내에서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현지생산을 늘려주는 부분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김대종 교수도 “비슷한 정책 기조가 트럼프 대통령 이후에도 반복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현지생산 기반 확대는 더 구조적인 대응으로 볼 수 있다”며 “다만 인건비와 비용 상승에 따른 수익성 악화, 향후 규제 완화나 정책 변화와 같은 불확실성 등을 충분히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자무역을 확대해 미국 수출 의존도를 줄이고 새로운 수출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는 진단도 나왔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TP)에 가입할 필요가 있다”면서 “CPTTP는 아시아태평양 11개국의 자유무역협정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새로운 수출 시장을 개척하고 중국과 미국에 대한 수출 의존도를 낮출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대종 교수 역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로 대표되는 중동과 아프리카, 인도 등은 내수 시장에 빠르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중장기적으로 유망한 대체 시장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조치로 촉발된 무역 전쟁이 우리 기업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견해도 제시됐다. 정 조사관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총체적, 전면적인 통상 전략 개편은 우리 산업에 위협과 기회 요인을 동시에 제공하고 있다”며 “이번 위기에 제대로 대응한다면 중장기적으로는 수출 시장에서 선도적 입지를 확보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원장은 “경쟁국과의 관세 격차, 자동차 및 반도체 등에 중복적으로 관세가 부과되지 않은 점을 볼 때 최악의 결과는 아니다”면서 “정부는 협상으로, 경제단체 등 민간은 미국 설득으로 관세 파고를 극복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