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비상계엄 사태 발생 보름쯤 됐을 때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주심으로 정형식 재판관이 배정됐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헌재의 공정성 논박이 불이 붙은 건 아마 그때부터였다.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는 정 재판관은 당시 6인 체제였던 헌재에서 윤 전 대통령이 지명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가 주심을 맡았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안도감을, 또 다른 이에게는 불안감을 심어줬다. 결과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해석이 난무했다.
당시 한 로스쿨 교수는 기자에게 “정 재판관은 평생 판사만 한 사람”이라며 “판사는 정치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는다. 법적 요건이 탄핵을 가리키는데 어떻게 판단을 달리하겠나”라고 반문했다.
그 후로 진보 성향 판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출신 문형배·정계선 재판관을 향해서도 정치 편향 논란이 이어졌다. 대통령 권한대행은 국회가 선출한 마은혁 재판관 임명을 미뤘다. 탄핵 선고 전날 검사 출신 한 변호사는 “이제는 결과를 진짜 모르겠다”고 했다.
헌재를 둘러싼 무성한 소문들이 짙은 안개가 돼 탄핵심판의 본질을 흐리게 했다.
4일 헌재는 재판관 8명 전원일치로 윤 전 대통령 파면을 결정했다. 비상계엄 선포 요건, 계엄 포고령, 국회로의 군경 투입,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압수수색, 법조인 위치 확인 시도 등 모든 쟁점이 ‘올 빙고’ 위헌·위법이었다. ‘윤의 사람’으로 불리던 정 재판관은 주심으로서 파면 결정문 초안을 썼다.
계엄부터 파면까지 123일이 걸렸다. 지난해 12월 3일 밤, 비상계엄의 실체는 이미 명료하게 드러났다. 대통령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냐 아니냐, 즉 중대성이 문제였다.
돌이켜보면 눈과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비상계엄 선포 소식을 접했을 때, 계엄군이 기어코 국회 유리창을 깼을 때, 포고령 속 언론 통제 문구를 확인했을 때, 메시지가 지지자들만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면 그러면 안 됐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직위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사람이 변해간다는 말이다. 헌재 재판관들은 정치에 휘둘리지 않았다. 법관으로서 올곧은 판단을 내렸다.
윤 전 대통령은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는가, 다시금 생각해 본다. 법과 원칙을 따른다던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은 임기를 3년도 채우지 못하고 파면됐다.
헌재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으로서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을 초월해 사회공동체를 통합시켜야 할 책무를 위반했다’고 질책했다. 헌법수호의 책무를 저버리고 주권자인 국민의 신임을 중대하게 배반했다는 것이다. 자리가 만들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