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칼럼] 바둑으로 만들어가는 사회

입력 2016-02-1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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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바둑이 화제다. 납득할 만한 사유가 있다. 2014년에 ‘미생’이라는 웹툰 원작 TV드라마가 크게 히트했다. 바둑이 삶의 전부였던 장그래가 프로기사 입단에 실패한 뒤 직장생활 등 냉혹한 현실에 부딪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어 지난해에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프로기사의 삶을 알게 함으로써 바둑에 대한 흥미를 높여주었다.

또, 지난 주말 유창혁 9단의 우승이 확정된 ‘2016 전자랜드배 한국바둑의 전설’ 기획이 흥미롭게 펼쳐졌다. 조훈현(63) 서봉수(63) 조치훈(60) 유창혁(50) 이창호(41) 등 한국바둑의 전설인 다섯 기사의 풀 리그는 바둑팬들을 열광케 했다.

이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발표된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의 대국은 ‘인간 대 기계의 승부’라는 점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구글의 자회사 딥마인드가 개발한 ‘알파고’와 이 9단의 3월 9~15일 다섯 번 대결은 많은 이들이 예측하는 대로 이 9단이 이길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인간의 정보처리 방식을 모방해 컴퓨터 스스로 판단하고 학습하는 ‘딥 러닝(deep learning)’ 기술로 만들어진 알파고는 점점 더 강해질 것이다. 체스에 이어 바둑에서도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기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다.

이번 대국은 세 판을 먼저 이기면 우승하지만 다섯 판을 끝까지 다 두는 조건이니 딥마인드는 거금을 내건 대가로 바둑 최고수로부터 최고급 자료를 얻는 셈이다. 쉬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학습하는 알파고와의 대국이 거듭될수록 이 9단은 자신과 싸워야 한다.

이런 네 가지 ‘바둑사건’이 잇따라 벌어짐에 따라 우리 사회는 바둑 자체에 대해, 바둑과 인간의 삶에 대해, 바둑과 기계에 대해 새로 생각할 기회를 얻게 됐다. 바둑을 고리타분한 기성세대의 놀이라고만 생각해온 젊은이들의 인식을 바꿔줄 수도 있는 좋은 기회다. 즐겁고 반가운 현상이다.

바둑을 인문학에 접목하는 시도도 이제 제 궤도에 오른 것 같다. 2007년에 명지대 바둑학과 학생들이 결성한 독서모임은 지금 프로기사 독서모임으로 확대 운영되고 있다. 젊은 프로기사들의 자원봉사 바둑단체 ‘바둑으로 세상을 바꾸자(바세바)’는 길거리바둑, 한강공원 치맥바둑 나들이 등 다양한 놀이 형태로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꽃보다 바둑센터(꽃바)’라는 교습소를 통해 ‘바둑을 통한 소통’을 추구하는 여성 프로기사들도 있다.

바둑은 사실 단순한 유희나 도락이 아니다. 현묘심원(玄妙深遠)한 동양정신의 정수이며 다양다기한 삶이 담긴 기예요, 오로화락(烏鷺和樂)의 흥겨운 수담(手談)이다. 소동파의 시처럼 바둑은 “이기면 정말 기쁘고 져도 또한 즐겁다.”[勝固欣然 敗亦可喜] 예부터 선비라면 금서기화(琴書棋畵), 거문고 글씨 바둑 그림에 두루 능해야 한다고 믿어왔다.

바둑에 담긴 화락의 정신, 기력 향상을 위한 노력, 규칙을 준수하고 승복하는 자세, 승부가 끝난 뒤 복기를 통해 서로 배우는 겸손을 익혀야 한다. 바둑 격언은 또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남을 공격하려면 나를 돌아보라, 승리를 탐하면 안 된다,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 하나같이 실제 삶에 적용할 가르침이다.

화투나 바둑 여행을 함께 해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지만 이 세상의 일 가운데 그 사람이 하는 것이 그 사람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글도 곧 그 사람, 글씨도 곧 그 사람, 바둑도 곧 그 사람이다.

바둑을 두는 사람들의 기풍은 크게 두터우냐 가벼우냐로 대별된다. 두터우면 느리고 둔하고, 가벼우면 신속 경쾌하지만 엷다. 프로기사들의 승부세계에서는 두터움과 속도가 늘 갈등하고 쟁투한다. 이 두 가지의 순환과 교체가 바둑사라고 할 수 있다.

바둑에서처럼 참고 견디며 두터운 행마로 보람을 쌓아가는 삶의 자세가 존중돼야 하지 않을까. 날렵하고 신속한 것만 미덕으로 알고 찬미하는 사회에 대해, 바둑에 새로 눈뜬 젊은 세대에 대해 특히 해주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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