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벌초 땐 벌벌 벌조심

입력 2015-09-09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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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벌초를 겸한 성묘를 다녀왔다. 아직 한낮 햇살이 따갑고 벌초객들로 도로가 붐빌 듯해 새벽 5시경 출발했다. 예취기(刈取機)와 낫, 긴소매 옷, 모자, 수건, 장갑, 얼린 물, 벌·모기 퇴치용 살충제 등 준비물을 꼼꼼히 챙겼다. 결혼한 이후 매년 벌초에 참여하는 것은 조상을 잘 섬겨야 내 자식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경기도 가평군 운악산 기슭 깊숙이 자리한 시조부모님과 시아버님 산소에 도착하니 무덤가에 풀이 무성했다. 봉분 위에는 이름 모를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추석이 눈앞이지만 산속은 한여름이었다. 살찐 가을볕에 구슬땀을 흘리며 정성껏 풀을 깎았다. 이때 가장 두려운 건 독성이 강한 말벌이다. 벌초 중 이놈에게 쏘여 사망하는 사고가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크다는 뜻의 접두사 ‘말’이 붙은 만큼 이놈은 덩치가 어른 새끼손가락만 하다. 잘 다듬어진 무덤 앞에서 예를 갖추고 인사를 올리고 나니 한 번도 뵙지 못한 시아버님께서 “고맙다”며 어루만지시는 느낌이 들었다. 명절을 앞두고 조상의 산소를 찾아 풀을 베는 것은 어쩌면 마음을 닦는 수양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벌초(伐草)’는 무덤의 풀을 깎아 잔디를 잘 가꾸는 일로, 한식(寒食)이나 추석 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경기도에는 추석이 지나 벌초하는 사람은 자식으로 안 친다는 말이 있다. 또 제주지역에는 8월 초하룻날 친척들이 모여 공동으로 벌초를 하는 ‘모듬벌초’ 풍습이 있다. 벌초는 음력 7월 하순경이 가장 좋은 시기다. 절기상 백중, 처서를 지나면 햇볕이 누그러져 풀이 성장을 멈추기 때문에 이때 벌초를 하면 다음해 봄까지 산소를 깨끗이 보전할 수 있어서다.

중부지방에서는 벌초를 금초(禁草)라고도 한다. ‘금화벌초(禁火伐草)’의 준말로, 무덤에 불조심하고 때맞춰 풀을 베어 잔디를 잘 가꾼다는 뜻다. 그런데 무덤에 불조심을 한다는 뜻은 거의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굳이 벌초와 금초를 구별해 쓸 필요는 없다. 항간에 조상님 산소의 풀을 깎을 때 ‘칠 벌(伐)’자를 쓰는 것은 공손한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해 ‘벌초’는 상놈이, 금초는 양반이 쓰는 용어라는 말이 있으나 이는 전혀 근거가 없다.

사초(莎草)는 벌초, 금초와 조금 다르다. 묘의 봉분을 다시 높이거나 무너진 부분을 보수해 잔디를 새로 입히고 묘지 주변에 나무를 심는 일로, 주로 한식날 한다. 조상의 산소는 아무 때나 손대는 것이 아닌데 이날이 손(損)이 없어 좋은 날이고 또 절기상으로도 좋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벌초를 중히 여긴 우리의 문화는 속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추석 전이 소분 안허민 자왈 썽 멩질 먹으레 온다(추석 전에 소분을 안 하면 조상이 덤불을 쓰고 명절 먹으러 온다)’, ‘식게(제사) 안 한 것은 남이 몰라도 벌초 안 한 것은 남이 안다’ 등의 제주지역 속담은 조상을 잘 섬겨야 하는 당위성을 일깨워 준다. 또 ‘의붓아비 묘 벌초하듯, 처삼촌 뫼에 벌초하듯, 외삼촌 산소에 벌초하듯” 등의 속담은 무슨 일을 할 때 정성을 다하지 않고 대충대충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맡은 일에 정성과 감사의 마음이 얼마나 깃들어 있는가를 비유한 표현이다.

추원보본(追遠報本). 조상의 덕을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고, 자기의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는다는 말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올 추석에도 고향에는 어머니 웃음만큼이나 넉넉한 보름달이 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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