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개장국과 복국

입력 2015-07-13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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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발 향그런 차 조그마한 얼음 띄워/ 마셔보니 참으로 무더위를 씻겠네/ 한가하게 죽침(竹枕) 베고 단잠에 막 드는 차에/ 손님 와 문 두드리니 백번인들 대답 않는다네.’ 조선 초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시 ‘삼복(三伏)’이다. 무더위 속에 꿀 같은 낮잠에 빠진 학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삼복 기간은 무더워 입술에 묻은 밥알도 무겁다고 했다. 오늘은 삼복 가운데 첫 번째인 초복(初伏)이다. 23일이 중복이고, 말복은 8월 12일이다. 휴대폰으로 초복을 알리는 메시지가 여러 개 왔다. 그중 ‘우야꼬, 또 복날이네. 이래 살아가꼬 뭐하겠노’라며 삶을 한탄하는 누렁이(황견)의 사진이 큰 웃음을 준다. 지금이야 장어, 전복, 민어, 삼계탕, 쇠고기 등 복절식(伏節食)이 다양하지만 예전엔 보신탕을 주로 먹었다.

개고기 식용에 대한 찬반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복날이면 애견단체, 동물보호단체 등이 개를 사람과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내용의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한다. 조선 영조 때 문신이자 경상도 암행어사로 이름을 떨친 이종성(1692~1759)도 “충심으로 사람을 받드는 동물을 복날이 됐다 하여 끓여 먹는 것이 어찌 사람이 할 짓인가?”라고 말하는 등 개고기 먹는 이를 매우 혐오했다. 그는 개를 키우고 사랑한 애견인이었다.

하지만 보신탕은 수백년 전부터 우리 민족이 즐겨 먹던 복절식으로, 한국인의 대표적 보양식일 만큼 인기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본초강목’과 ‘동의보감’에는 개고기가 오장의 기능을 돕고 피로 해소에 효능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음식디미방(1670)’에는 개장국 끓이는 방법이 자세히 나와 있다. 조선시대에 돈과 권세 있는 양반들이 복중에 쇠고기와 민어를 즐겼다면 보신탕은 가진 것 없는 서민들의 보양식이었다.

보신탕은 이승만 정권 때 만들어진 말이다. 이전의 이름은 개장국, 한자로 구장(狗醬), 지양탕(地羊湯)이었다. 개고기 먹는 문화를 외국인들이 미개하다고 여길 것으로 판단해 개장, 구장이란 명칭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구장, 개장, 개장국, 지양탕이 올라 있고, 보신탕은 유사어로 나온다. 언중은 ‘영양탕’ ‘사철탕’도 같은 의미로 혼용하고 있지만 둘 다 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복요리도 복절식으로 인기다. 그런데 복집 메뉴판에 떡하니 올라 있는 ‘복지리’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복어에 콩나물, 미나리, 파 등 각종 채소를 넣고 말갛게 끓여 시원한 맛은 일품이다. 다만 ‘복’(鰒)과 ‘지리’(汁)가 합친 말이라서 거슬리는 것이다. ‘지리’는 일본어 ‘汁’(じる)에서 온 말이다. 그러니 지리를 버리고 ‘복국’이라고 하는 것이 바르다. 요리의 특징을 살리고 싶다면 우리말 맑은장국의 장국을 붙여 ‘복장국’으로 부르면 된다. 복매운탕과 짝을 이루는 의미로 ‘복싱건탕’으로 써도 좋다. 더불어 복집 메뉴 중 사시미는 생선회, 덴푸라는 튀김, 스시는 초밥으로 순화해야 한다. 일본식 언어습관은 하루빨리 버려야 한다.

“당신은 개고기를 먹습니까?”는 충청도 사투리로 “개 혀?”다. 행동과 말투가 느리기로 유명한 충청도에서도 복날이 되면 빨라지는 말이다. 오늘 이 질문을 받은 이가 여럿일 것이다. 예전에야 먹을 것이 없어서 개장국을 먹었다지만 지금은 영양식이 얼마나 많은가. 진정한 보양식은 좋은 사람들과 즐거운 대화를 하며 먹는 음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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