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車 베끼며 '車 강국' 밑거름 다졌다

입력 2011-06-17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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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를 달려온 한국자동차]⑥현대, 미쓰비시와 고급차 공동개발</br>기아, 마쓰다와 핵심기술 공유 못해

2000년대 중반들어 국산차의 경쟁력은 빠르게 치솟았다. 매7년마다 차 안팎을 화끈하게 바꾸는 여느 완성차 메이커와 달리 현대기아차는 급변하는 트렌드에 맞춰 발빠르게 새 모델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최근 괄목할만한 호실적 역시 이러한 제품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이러한 눈부신 경쟁력 뒤에는 1980년대 현대·기아차에 자신의 청춘을 불살랐던 자체개발 엔지니어 1세대의 노력이 처연하게 스며있다.

당시 이렇다할 기술력 없이 일본차 기술을 들여왔던 국내 완성차는 부지런히 일본차를 쫓아가며 기술력을 쌓았다. 덕분에 일본에서 실패한 차가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기술력을 갖추기 위한 다양한 도전도 이어졌다. 1980년대 말 기아산업은 전세계가 인정한 ‘합법적 산업 스파이’나 다름없었다.

▲일본 미쓰비시 2세대 데보네어. 일본에서 한해 1000여대만 팔리며 참패한 차다. 반면 이를 바탕으로 현대차가 선보인 1세대 그랜저는 매년 2배씩 성장을 이어가 1990년 2만6000여대가 팔렸다. 요즘 현대차 에쿠스조차 꺠지 못하는 기록이다.
◇일본에서 망한車…현대차는 대성공= 1986년 공업합리화조치가 해제된다.

동시에 중형차 개발 및 생산에 뛰어든 현대차는 이 시점에 앞서 일본 미쓰비시를 일찌감치 찾았다. 이미 1975년 포니를 개발하면서 엔진기술을 들여왔고 관계를 돈독히 지키던 때였다. 현대차가 일본에 건너간 이유는 고급차 기술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미쓰비시는 1970년대초 개발한 ‘데보네어’라는 고급차를 보유했다. 그러나‘미쓰비시 임원을 위한 의전차’로 치부되고 말았다. 선두 기업인 도요타에 밀려 고급차 시장에서 참패를 겪던 참이었다.

결국 ‘공동개발’이라는 명제를 앞세워 현대차는 데보네어의 모습을 이어받아 새 모델을 개발했다. 바로 1세대 그랜저다.

1987년 데뷔 첫 해 그랜저는 대우 로열시리즈가 독점했던 고급차 시장을 단박에 빼앗아왔다. 넓은 실내공간과 기다란 차체는 당시 고급차의 필요조건이었다.

그랜저는 날개돋친 듯 팔렸다. 데뷔 첫 해인 1986에는 2422대가 팔렸다. 이듬해인 1987년에는 2배 가까이 늘어 4076대가 판매됐다. 서울올림픽 열기가 뜨거웠던 1988년 역시 2배의 증가율을 보이며 8190대가 팔렸다.

2000cc 한 가지였던 모델이 2400cc, 3000cc로 늘어나면서 1989년에는 마침내 1만대 판매를 돌파해 1만2616대가 팔렸고, 1990년에는 역시 전년대비 2배 이상이 늘어 2만6004대가 팔렸다.

1990년 국내 최고급차의 2만6000여대 판매는 지금도 쉽게 깨질 수 없는 기록이다. 고급 수입차가 봇물터지듯 쏟아지는 요즘도 깨지기 쉽지 않다. 2009년 출시된 현대차의 최고급 모델 에쿠스 판매는 1만5000대가 안되는 시절이다. 그만큼 당시 현대차 그랜저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반면 바다건너 일본땅을 달렸던, 현대차 그랜저와 똑같은 디자인의 미쓰비시 데보네어는 고전을 면치못했다. 1년 판매량이 1000여대를 기록할만큼 판매가 저조했다. 우리 자동차시장보다 3배 이상 큰 일본시장을 감안하면 데보네어는 개발비도 뽑아내기 버거웠다.

이후 데보네어는 3세대(현대차 2세대 뉴 그랜저)로 거듭났지만 여전히 실패를 거듭했다. 결국 4세대부터 프라우디아(현대차 1세대 에쿠스)로 거듭났으나 여전히 흥행은 실패였다. 같은 기간 현대차는 그랜저의 윗급으로 에쿠스를 선보이며 또 한번 고급차 시장을 휩쓸기 시작했다.

▲기아차 콩코드의 베이스가 된 일본 마쓰다의 카펠라. 콩코드는 당시 오너 드라이버를 위한 고성능 슈퍼세단을 지향했다.
◇세계최고의 역설계 전문가 기아산업= 이 무렵 기아산업(기아자동차의 전신) 역시 일본 마쓰다와 손잡고 다양한 모델을 국내에 소개했다. 마쓰다 파밀리아를 들여와 1세대 프라이드를 선보였다. “마쓰다차가 한국에서 먹힌다”고 자부했던 기아산업은 곧바로 마쓰다의 중형차 카펠라를 들여왔다. 바로 1세대 콩코드다.

콩코드가 등장하던 당시는 2000cc 중형차는 사장님의 뒷자리용 고급차였다. 이른바 ‘소퍼 드리븐’이었다. 반면 기아산업은 세계최초의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의 이름을 고스란히 이어오면서 ‘오너 드라이버를 위한 고성능 세단’을 추구했다.

경쟁 모델보다 작았던 콩코드는 직렬 4기통 2.0 엔진으로 최고출력 115마력을 냈다. 요즘 기준으로 소형차보다 못한 성능이었지만 당시 고속도로에서 콩코드를 따라잡을 중형차는 없었다.

그러나 미쓰비시가 화끈하게 현대차와 기술을 공유한 것과 달리 일본 마쓰다는 기아산업에게 기술이전을 쉽사리 내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부품을 국산화했지만 핵심기술은 여전히 마쓰다의 그것을 고스란히 들여왔다. 결국 기아산업은 일본에서 들여온 차를 하나씩 분해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Tear down’이다. 당시 기아산업 연구원들은 흔히 ‘뜯어보기’로 불렀다.

기술이 절실했던 기아산업은 당시 ‘세계최고의 역설계 기술’을 지녔다. 차 한 대를 주면 그 차를 분해하면서 하나씩 설계도를 그려냈다. 때문에 남들이 철통같이 지켜내는 새 모델의 설계도를 냉큼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모두가 엔지니어출신의 경영자 김선홍 당시 기아산업 회장의 지시로 이뤄졌다.

최근 난무하는 중국 자동차 메이커가 한국차를 가져다 분해하며 설계도를 뽑아내는 것도 모두가 1980년대말 기아산업이 취했던 개발 방법이다.

콩코드를 베이스로 개발한 준중형차 캐피탈과 후속 모델인 세피아 역시 일본 마쓰다차를 가져와 역설계해서 설계도를 뽑아낸 주인공이다.

당시 기아산업에 몸담았던 이들은 김선홍 회장의 지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다른 회의는 몰라도 상품기획과 제품에 관련된 회의는 반드시 김선홍 회장께서 직접 참관하셨다. 엔지니어 출신답게 제품 전반에 대한 이해도와 기획력은 당시 연구원들이 옴짝달싹 못하게 하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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