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거주 수요 여전…전세 공급은 한계
잦은 정책 변경에 불확실성 커져

정부가 토지거래허가구역 내 실거주 의무 유예 대상을 갱신계약까지 확대하면서 기존 세입자들이 이사 대신 재계약을 선택할 여지가 커졌다. 당장 이사 부담을 덜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지만 기존 세입자의 거주 기간이 길어지면서 시장에 나오는 신규 전세 물건이 줄어들 가능성이 제기된다.
17일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현재 살고 있는 세입자의 이사를 늦추는 효과는 있지만 주거 불안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는 어렵다고 진단했다. 갱신계약이 끝난 뒤 새 집주인이 입주하면 기존 세입자는 결국 다른 집을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임대차계약 기간에 그대로 거주할 수 있다는 점은 임차인에게 긍정적"이라면서도 "유예 기간 안에 임대차계약이 만료되는 주택은 매물로 나온다는 전제가 이번 조치에 깔려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정책 의도에 따라 해당 주택이 매도되고 새 집주인이 실거주하려 한다면 기존 세입자는 결국 이사할 집을 구해야 한다"며 "기존 전세보증금만으로 자신이 살던 집을 매수하기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서울 전·월세 시장에서는 이미 새집으로 옮기기보다 계약을 연장하는 임차인이 늘고 있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을 분석한 결과 지난달 서울 아파트 전·월세 계약 1만4238건 가운데 갱신계약은 7282건으로 51.1%를 차지했다. 신규계약은 6718건이었다. 계약 구분이 표시되지 않은 238건을 제외하면 갱신계약 비중은 약 52%다. 전세만 놓고 보면 계약 10건 중 6건이 갱신이었다.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하지 않고 집주인과 합의해 재계약한 사례도 늘었다. 지난달 갱신계약 가운데 청구권을 사용하지 않은 계약은 4383건으로 60.2%를 차지했다. 올해 1월 53.5%보다 6.7%포인트(p) 높다. 전셋값 상승세 속에서 새집으로 옮기기보다 기존 계약을 유지하는 임차인이 늘어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계약갱신이 늘어도 전셋값을 낮추는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심형석 법무법인 조율 수석전문위원(미국 IAU 교수)은 "지금은 전세 매물이 부족해 가격을 올려도 계약이 이뤄지는 시장"이라고 설명했다. KB부동산에 따르면 지난달 서울 아파트 평균 전세가격은 7억1178만원으로 1년 새 5999만원 상승했다.
문제는 입주 시점을 늦추는 것만으로 전세 시장에 나오는 주택을 늘리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 대출 규제 등 다른 제도는 여전히 실거주를 유도하고 있다.
심 위원은 "전월세난이 심각해진 이유 중 하나는 집주인이 직접 들어가 살면서 세입자가 집을 비워야 하는 상황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세제에서는 거주 주택과 비거주 주택을 구분해 비거주 주택의 부담을 높이고, 대출을 받은 사람에게도 전입을 요구한다"며 "이런 제도를 그대로 둔 채 입주만 유예한다고 해서 집주인의 실거주 수요가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잦은 정책 변경은 임대인과 임차인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요인으로 꼽힌다. 정부가 실거주 의무를 강화한 뒤 시장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유예 기간을 늘리고 적용 대상을 넓히면서 임대인과 임차인 모두 장기 계획을 세우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집주인의 실거주와 계약 갱신을 둘러싼 갈등은 늘고 있다. 국회 재정경제기획위원회 소속 이종욱 국민의힘 의원이 한국부동산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주택임대차 분쟁조정 접수 현황'에 따르면 올해 1~7월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에 접수된 계약 갱신·종료 관련 분쟁조정 신청은 131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65건보다 두 배 이상 증가했다. 7개월 만에 지난해 연간 접수 건수인 122건도 넘어섰다.
세입자들은 실거주 유예가 확대돼도 안심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세금 부담이 커진 집주인이 주택을 팔거나 직접 입주하기로 하면 결국 집을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내년 임대차계약 만료를 앞둔 30대 직장인 A 씨는 "정부가 실거주 의무를 유예했지만 높아진 세금 부담 때문에 집주인이 언제 집을 비워달라고 할지 몰라 불안하다"며 "과거에도 갑작스럽게 이사한 적이 있어 이번에는 집주인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고 계약 만료 전에 미리 새집을 알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