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 국가들, 지역 내 수요에서 미-중 확장⋯AI 공급망 확대 역할
"커넥터국 우회연결로 생산·수출경로 확장⋯韓 공급망 회복력 제고"

미·중 갈등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 지정학적 긴장이 장기화하고 있음에도, 글로벌 교역은 과거 냉전기와 같은 전면적인 블록화로 치닫지 않고 안정적인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베트남, 인도, 멕시코 등 이른바 ‘커넥터 국가(Connector countries)’가 미·중 사이의 생산·조달 네트워크 중간 거점 역할을 수행하며 글로벌 경제 연계를 잇고 있어서다.
한국은행은 11일 발표한 BOK 이슈노트 '지정학적 분절 속 글로벌 경제연계는 어떻게 재편되고 있는가' 보고서를 통해 "글로벌 상품교역과 외국인직접투자(FDI) 규모는 미·중 갈등이 본격화된 2017년 이후에도 전면적 단절 없이 견조한 추세를 이어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은 조사국 거시분석팀이 유엔(UN) 총회 표결자료를 바탕으로 2016년 대비 2024~2025년 각국의 대미·대중 정렬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다수 국가는 정치·안보(지정학) 측면에서 미국 쪽으로 이동했으나, 경제·개발(지경학) 측면에서는 국가별 산업구조와 공급망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디커플링' 현상이 뚜렷했다.

특히 베트남·인도·멕시코 등 '커넥터 국가'의 분리 양상이 두드러졌다. 이들 국가는 지정학적으로 미국 측에 가까워졌으나 지경학적으로는 중국에 가까운 입장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중국 쪽으로 더 밀착하는 행보를 보였다. 미국의 거대 최종 소비시장과 중국 중심의 중간재 생산망 모두와 긴밀히 얽히며 양국을 이어주는 완충지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반면 한국·일본·호주 등 전통적 우방국들은 정치와 경제 정렬 모두에서 미·중 중간 위치를 대체로 유지해 커넥터 국가들과는 차이를 보였다.
글로벌 분절 구조의 재편은 우리나라 수출 및 공급망 지형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OECD 국제산업연관표(ICIO) 분석 결과, 한국의 대(對)베트남 수출에서 창출된 부가가치 중 미국의 최종수요(소비·투자)로 연결된 비중은 2016년 11.1%에서 2022년 18.5%로 급증했다. 같은 기간 중국으로 이어진 비중 역시 7.3%에서 13.9%로 2배 가까이 늘었다. 주력 수출 품목인 반도체 등 전자부품 업종의 경우 베트남을 거쳐 미국(12.8%→21.0%)과 중국(11.2%→19.4%)으로 귀착된 비중이 모두 큰 폭으로 상승했다.
정선영 한은 조사국 아태경제팀장은 "본래는 아시아 지역 내 수요를 해소하는 역할을 하던 아세안 국가들이 지금은 미국과 중국으로 가는 비중이 커졌다"면서 "수출이 확대되면서 미국이나 중국 수요를 받아주는 부분이 더 특화됐다고 보시면 된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전체 부가가치가 미국 최종수요로 이동하는 간접 경로에서도 지각변동이 확인됐다. 미국으로 향하는 직접 수출 비중은 약 72% 수준을 유지했으나, 제3국을 경유하는 간접경로에서는 ‘중국 경유’ 비중이 10.7%에서 6.8%로 급감한 반면, ‘아세안 5개국 경유’ 비중은 4.9%에서 8.3%로 확대됐다. 특히 반도체·전자 업종의 아세안 경유 비중은 2022년 18.6%까지 치솟으며 중국 경유 비중(17.0%)을 사상 처음 추월했다.
AI 공급망과 관련해서도 커넥트 국가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고 봤다. 정 팀장은 "글로벌 교역의 경우 데이터 확인에 시차가 발생하는데 2022년이나 이후 2025년 이후로도 교역이 견조하게 유지되고 있다"면서 "실제 데이터를 보면 AI 공급망 관련 역할을 하는 (커넥트) 국가 수출이 무척 좋은 상태"라고 평가했다. 정 팀장은 그러면서 "베트남 등 아세안 생산망을 통한 우회 연결이 지정학적 충격 시 생산·수출 경로의 선택지를 넓혀 우리나라 공급망의 회복력을 높여주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아세안을 통한 우회 연계가 심화된 만큼 리스크도 상존한다고 경고했다. 미국이 원산지 규정 강화나 우회수출 조사 등 무역·공급망 규제를 조일 경우 아세안 현지 생산을 거쳐 국내 중간재 수요까지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조사국은 "커넥터 국가의 완충 기능을 영리하게 활용하되, 주요국의 정책 변화나 공급망 충격이 국내로 전이될 위험을 상시 관리하고 특정 경로에 편중되지 않도록 다변화를 지속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