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딥시크 쇼크로 사전학습에서 추론 중심으로 대전환되며 고성능 메모리 대량소비 시대가 열렸다. 우리 반도체 기업의 초격차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배터리 산업이 남긴 교훈을 이제 떠올릴 때이다. 당시 셀사 최고경영자(CEO)들도 ‘수주 잔고 1000조원’을 외치며 끝없는 성장을 확신했다. 에너지 밀도에 집착하다가 오판하여 실용적 대안인 리튬인산철이차전지(LFP)와 소듐이온이차전지(SIB)가 차세대 시장을 통째로 가져가 버렸다. 지금 ‘D램 부족이 10년 간다’는 장밋빛 전망은 그때와 판박이다. 둘 다 호황 정점에서 ‘이번에는 다르다’는 확신에 빠졌다.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이 가장 위험할 수 있다.
물론, 배터리와 메모리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배터리의 LFP 전환처럼 고성능 메모리는 인공지능 데이터센터(AIDC) 성능과 직결돼 대체되기 어렵다. 한국 기업의 고대역폭메모리(HBM) 점유율 90% 이상은 배터리보다 견고한 기술 해자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구글 TPU, 메타 MTIA, 마이크로소프트 Maia 같은 빅테크의 자체 특화 칩 생태계가 빠르게 커지며 엔비디아 의존도도 줄이고 있다.
글로벌 PC 제조사들도 CXMT D램을 탑재하기 시작했고, 2030년 점유율이 급격히 오를 거란 관측도 일각에서 나온다. 결국, AI 수요 폭증이 범용 메모리도 집어삼키고 있다. 이쪽도 AI용 슈퍼칩으로 대거 소비되고 있어 모바일 IT, 자동차 등 범용 메모리 출하가 줄며 2026년 대비 30%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다.
범용 D램 가격은 수급으로 2025년 초 대비 200% 이상 치솟았고 현 수준이 지속 불가능하다는 경고도 나온다. AI 혁명이란 미명하에 범용 메모리 부족은 전 분야의 인플레이션 불씨가 될 수도 있다. AI 열풍의 대가를 결국 소비자가 이중으로 치르게 되는 셈이다. 한국 기업이 AI용 슈퍼칩에 집중하고 범용 D램을 지금 방치하면, 배터리 산업이 에너지 밀도에 갇혀 시장을 내준 것과 같은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중국이 범용을 장악한 뒤 AI용 슈퍼칩까지 올라오는 고품질 제조 전략을 본격적으로 구사할 때, 우리는 긴장해야 한다.
삼성전자는 최근 AIDC용 웨이퍼 본딩 기반 차세대 메모리 3종을 공개하며 기술 패권 수성을 선언했다. HBM 기술 우위를 지키되 GDDR7까지 포트폴리오를 넓히고 가성비 전략, 한쪽만 베팅하는 전략은 위험하다. 배터리 산업이 셀 중심 경쟁에서 차세대 전지와 패키지 기술(Pack: CTP · CTC)로 판세가 갈린 것처럼, AI 반도체쪽도 다음 위기는 AIDC의 ‘랙(Rack)’에서 올 수 있다.단위의 통합-최적화가 가속되면 개별 모듈 단위의 기술 해자는 무력화되기도 한다. 호황 한복판일수록 불황까지 내다보는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기술 패권의 해자를 강력하게 지킬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