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공급망 관리·혼류 생산 확대…부품사도 재고 확보 부담 커져

중동 전쟁 장기화와 홍해·호르무즈 해협 지정학적 리스크가 상시화하면서 자동차업계의 공급망 전략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수십 년간 비용 절감의 핵심이었던 ‘적시생산(JIT·Just In Time)’ 대신 핵심 부품을 미리 확보하는 ‘안전재고(Safety Stock)’ 체제가 새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13일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현대자동차·기아를 비롯한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공급망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해 핵심 전장부품과 원자재 재고를 확대하는 동시에 공급망 다변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기존 1~2주 수준이던 핵심 부품과 원자재 재고를 약 1개월 수준으로 확대하는 등 생산 효율보다 공급 안정성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전환하는 모습이다.
변화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S&P 글로벌 모빌리티에 따르면 글로벌 완성차 업계의 평균 재고 일수는 2021년 18.5일에서 2022년 21일, 2023년 26일, 2024년 31일로 꾸준히 증가했다. 중동 전쟁 이후에는 지난해 35일에서 올해 5월 41.5일로 6.5일 늘었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일상이 되면서 비용 절감보다 생산 연속성을 중시하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동안 글로벌 자동차업계는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만큼만 부품을 공급받는 JIT 시스템으로 재고 비용을 최소화해 왔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과 홍해 사태, 중동 전쟁까지 공급망 충격이 반복되면서 단 하나의 핵심 부품 부족으로도 생산라인 전체가 멈추는 JIT의 한계가 드러났다.
황광택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지정학적 위기로 적시생산 구조의 연속성이 마비되면서 공급망 전반의 리스크 관리 체계 구축이 필수 과제가 됐다”고 말했다.
자동차업계는 재고 확대를 넘어 생산 방식 자체도 바꾸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연 혼류 생산’이다. 특정 차종의 부품 수급에 차질이 생기면 생산라인을 멈추는 대신 다른 차종 생산 비중을 높여 공장 가동률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고정비 부담을 줄이고 공급망 충격에도 생산 차질을 최소화하고 있다.
AI를 활용한 공급망 관리도 확산하고 있다. 기업들은 물류 플랫폼을 통해 분쟁지역을 통과하는 선박 위치와 부품 입고 시점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생산 일정을 조정하고 있다. 홍해 항로가 막힐 경우 철도와 항공을 활용한 비상 운송망을 가동하는 등 공급망 복원력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
부품 조달 전략도 달라지고 있다.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중국 등에 집중됐던 일부 공급망을 인도와 아세안 등으로 다변화하는 한편 국내 생산 비중도 높이고 있다. 인증 중고차 사업 확대와 글로벌 생산 거점 다변화 역시 공급망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전략으로 꼽힌다.
다만 안전재고 확대가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재고가 늘어날수록 창고 운영비와 운전자본 부담이 커지고 자금이 재고에 묶여 기업의 재무 부담도 함께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에 업계는 AI 기반 수요 예측을 통해 적정 재고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새로운 경쟁력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에서는 JIT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최소 재고’를 경쟁력으로 삼던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예전에는 재고를 줄이는 것이 경쟁력이었다면 지금은 생산을 멈추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경쟁력이 됐다”며 “공급망 전략도 효율성 중심에서 복원력 중심으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