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D램·첨단패키징 선점 못 하면 中 추격 가속”
파운드리·후공정·소부장 묶는 생태계 구축 시급

AI 슈퍼사이클에 힘입어 국내 반도체 업계는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호황의 이면에서는 중국 반도체 산업이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추격하고 있다. 과거 성숙 공정과 범용 제품에 머물렀던 중국 업체들은 정부 지원과 대규모 투자, 인재 확보를 바탕으로 메모리 분야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미 일부 영역에서 중국 업체들의 기술력과 생산능력이 한국 기업을 위협할 수준에 근접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AI 특수가 언젠가 정상화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한국 반도체 산업이 어떤 경쟁 환경과 마주하게 될 것인지, 그리고 지금의 호황이 끝난 이후에도 기술 초격차를 유지할 수 있을지 살펴본다.
AI 반도체 슈퍼사이클에 올라탄 한국 반도체 산업이 사상 최대 호황을 이어가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지금이 오히려 ‘고대역폭메모리(HBM) 이후’를 준비해야 할 마지막 기회라고 진단한다. HBM 수요가 당분간 지속되더라도 AI 투자 사이클이 정상화되는 순간 범용 메모리 가격 경쟁과 중국의 추격이 동시에 현실화할 수 있다는 경고다.
7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향후 반도체 경쟁의 축이 단순한 미세공정이나 생산능력에서 차세대 메모리 구조, 첨단패키징, 파운드리, 소부장, 고객 맞춤형 설계 역량을 아우르는 생태계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봤다. 기술 초격차만으로는 중국의 물량 공세와 공급망 자립 전략을 방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박영준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명예교수는 “HBM은 한동안 갈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큰 흐름에서 보면 트랜지스터를 작게 만드는 경쟁에서 벗어나 D램, 낸드플래시, 광 연결 등을 섞어 전체 시스템 경쟁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기존 D램 구조를 단순화하거나 3차원으로 쌓는 방식, 낸드플래시의 속도를 끌어올려 D램과 보완적으로 활용하는 방식, 메모리와 그래픽처리장치(GPU) 사이의 데이터 이동 병목을 광 연결로 줄이는 시도 등이 병행될 것이란 설명이다.
이는 HBM 이후의 승부가 특정 제품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메모리 자체의 성능 개선뿐 아니라 시스템 전체의 전력 효율, 데이터 처리 속도, 고객 맞춤형 패키징 역량이 경쟁력을 좌우한다. AI 서버용 HBM에서 확보한 우위를 엣지 AI, 차량용 반도체, 커스텀 메모리 등으로 확장하지 못하면 한국 기업의 수익성도 흔들릴 수 있다.
가장 큰 리스크로는 첨단패키징과 파운드리 생태계의 취약성이 꼽힌다. 심대용 동아대 전자공학과 교수는 “한국은 메모리 생산능력으로 버티고 있지만 패키지 후공정, 특히 HBM처럼 다양한 고객 환경에 대응해야 하는 분야가 가장 큰 약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예전 후공정은 단순 조립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실리콘 인터포저, 2.5D·3D 패키징, 파운드리 공정이 하나의 컨소시엄처럼 맞물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만은 TSMC를 중심으로 파운드리, 반도체 후공정(OSAT), 설계자산(IP), 장비·소재 기업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생태계를 구축했다. 반면 한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메모리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췄지만 이를 뒷받침할 파운드리·첨단패키징·소부장 협력망은 상대적으로 얇다는 평가다.
심 교수는 “공장을 어디에 짓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기술 로드맵과 협력 구조”라며 “파운드리와 후공정을 결합해 2.5D, 3D 패키징까지 할 수 있는 기반을 빨리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HBM 이후에는 생산을 많이 해도 후공정이나 파운드리를 해외에 의존하면 수익을 나눠줘야 하고 특정 해외 기업의 기술 개발 차질에 국내 메모리 업체가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중국 추격의 본질도 단순한 기술 격차 축소에 그치지 않는다. 중국은 미국의 수출 규제로 첨단 장비와 AI칩 확보에 제약을 받았지만, 동시에 자체 공급망 구축 속도를 높였다. 메모리에서는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낸드에서는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 파운드리에서는 중신궈지(SMIC), 장비에서는 나우라와 중웨이반도체(AMEC) 등이 자국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당장은 한국 기업과 첨단 제품에서 격차가 있지만 저가 시장과 범용 제품을 기반으로 생산능력과 수율을 끌어올리는 전략이 반복될 수 있다.
이병훈 포항공대 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중국은 어느 시점이 지나면 설계, 파운드리, 메모리 모든 분야에서 저가 제품부터 치고 올라올 것”이라며 “신기술이 없으면 메모리는 결국 가격 경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한국의 연구개발 체계가 중국식 총력전에 대응하기에는 분절돼 있다는 점이다. 이 교수는 “중국은 중앙집권적으로 엄청난 인력을 동원해 연구하고 있지만 한국은 기업, 대학, 출연연, 중소기업이 따로 움직인다”며 “그동안은 기술 차이가 컸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강력한 경쟁자가 생겼을 때 지금 방식으로 경쟁이 될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국가 차원의 반도체 연구 거점과 기업 간 공동 연구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미국이 과거 일본 반도체 추격에 대응해 세마텍(SEMATECH)을 만들었던 것처럼, 한국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대학, 출연연, 소부장 기업이 기초·공통 기술 단계에서 협력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쟁은 최종 제품과 양산 단계에서 하더라도 차세대 구조, 장비, 소재, 패키징 등 공통 기반은 함께 개발해야 자원 낭비를 줄일 수 있다.
소부장 기업 육성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지금까지 국내 중소·중견 반도체 기업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물량 배정에 따라 실적이 흔들리는 구조에 가까웠다. 전문가들은 단순 납품 관계를 넘어 대기업이 기술 로드맵을 공유하고 초기 개발 단계부터 소부장 기업을 참여시키는 오픈 이노베이션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박 교수는 “한국 반도체 생태계는 너무 대기업 중심”이라며 “중소·중견기업이 더 실해져야 전체 생태계가 강해진다”고 말했다. 심 교수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번 호황기에 번 돈을 다음을 준비하는 데 써야 한다”며 “정부, 대기업, 소부장 업체가 연결된 컨소시엄과 장기 로드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