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보다 전자재료”…사업 전환이 만든 성장
“소부장 정책, 양산화 지원으로 진화해야”

이동훈 켐트로스 대표는 인터뷰 시작과 함께 ‘소재 국산화’와 ‘공급망 안보’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과거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묵묵히 기술력을 갈고닦아 온 켐트로스가 최근 AI 특수를 맞아 반도체·배터리 시장의 핵심 소재 기업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최근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AI 산업의 확산은 단순히 반도체 칩 제조사를 넘어, 후방 산업인 정밀화학 소재 기업들의 사업 구조까지 통째로 바꾸고 있다.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첨단 시스템반도체 수요가 폭발하면서, 회로를 그리는 초미세 공정에 필수적인 고성능 소재 수요 역시 전례 없는 속도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켐트로스는 이러한 거대한 패러다임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대표적인 수혜 기업이다. 회사는 반도체 노광 공정의 핵심인 포토레지스트(PR)에 사용되는 폴리머와 광산발생제(PAG), 그리고 반도체 세정용 시너 등 미세 공정용 핵심 소재를 전면에 내세워 시장을 공략 중이다.
시장의 반응은 숫자로 증명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켐트로스의 반도체 소재 관련 매출은 약 200억 5000만원으로 전체 매출의 35.2% 수준이었으나, 올해 1분기에는 그 비중이 무려 48%를 넘어서며 명실상부한 ‘반도체 소재 전문 기업’으로 체질 개선에 성공했다.
이 대표는 “주력 제품인 PAG와 폴리머뿐만 아니라 세정용 시너 역시 매출이 지속적으로 우상향하고 있다”며 “향후 전체 매출에서 반도체 소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압도적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업계 전문가들은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미세화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켐트로스와 같은 고부가가치 소재 기업의 몸값이 뛸 수밖에 없다고 분석한다. AI 반도체에 적용되는 극자외선(EUV) 및 불화아르곤(ArF) 노광 기술 기반의 최신 공정에서는 소재의 미세한 성능 차이가 최종 반도체의 ‘수율(양품 비율)’을 결정짓는 핵심 변수가 되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AI 반도체 시장이 커질수록 HBM과 첨단 시스템반도체의 초미세 공정용 포토레지스트 소재 수요는 필연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며 “결국 공정이 고도화될수록 후방 소재 기업의 기술력이 글로벌 반도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열쇠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AI 확산 효과는 반도체 소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산업계에서는 AI 경쟁의 핵심이 반도체 성능뿐 아니라 전력 효율과 기기 집적도로 확대되고 있다. AI 기능이 데이터센터를 넘어 스마트폰과 PC, 자동차, 로봇 등 다양한 기기로 확산되면서 관련 부품과 소재의 중요성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켐트로스는 전자재료용 접착제 사업도 영위하고 있다. 특히 방열 언더필 접착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발열 관리가 중요한 AI 기기 확대의 수혜를 기대하고 있다.
이 대표는 “온디바이스 AI 기기는 제한된 공간 안에 고성능 반도체와 카메라 모듈을 집적해야 하기 때문에 열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며 “카메라 모듈 적용 분야가 스마트폰을 넘어 전장과 로봇으로 확대되면서 관련 수요도 증가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AI 산업의 또 다른 축인 전력 인프라 확대 역시 켐트로스에는 기회 요인이다. 최근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AI 데이터센터 투자를 확대하면서 전력 사용량이 급증하고 있으며,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한 에너지저장장치(ESS) 구축도 함께 늘어나고 있다.
배터리의 성능과 안정성을 높이는 전해액 첨가제를 생산하는 켐트로스 역시 이러한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이 대표는 “AI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ESS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며 “전해액 첨가제는 배터리 수명과 안정성을 높여주는 핵심 소재로 AI 시대의 전력 인프라 확대에 따라 새로운 성장축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근 소재 산업을 둘러싼 환경 변화도 켐트로스에는 우호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AI 확산과 에너지 전환,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반도체와 배터리 소재 수요가 구조적으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이후 글로벌 기업들은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소재 기업들 역시 기술력과 안정적인 생산능력을 동시에 요구받고 있다.
이 대표는 “그동안 축적해온 국산화 기술력과 양산 경험이 해외 고객 확보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켐트로스가 처음부터 반도체 소재 기업을 지향했던 것은 아니다. 이 대표가 연구개발 현장에 몸담고 있던 시기 회사는 신약 개발과 바이오 소재 분야에 더 가까운 사업 구조를 갖고 있었다.
다만 신약 개발은 막대한 자금과 긴 개발 기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벤처기업이 감당하기 쉽지 않은 영역이었다. 상용화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경우도 많고 성공 여부 역시 불확실하다.
이 대표는 “신약 개발은 성공하면 큰 성과를 낼 수 있지만 사업화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자금 부담도 크다”며 “회사가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전자재료 분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후 회사는 반도체 등 소재 사업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이는 현재 켐트로스의 사업 구조로 이어졌다. 이 대표는 “지금 돌이켜보면 전자재료 분야로 방향을 바꾼 것은 매우 의미 있는 결정이었다”며 “한국 반도체 산업과 함께 성장하며 산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된 점을 뜻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수요 확대에 대응하기 위한 투자도 이어지고 있다. 켐트로스는 2021년부터 생산능력 확대를 위한 설비 투자를 진행해 지난해 10월 1차 증설을 완료했다. 특히 반도체 소재 사업은 2027년 수요를 고려한 증설을 이미 진행한 상태이며, 추가 투자도 검토 중이다.
소재 산업 특성상 기술 개발뿐 아니라 양산 능력 확보도 경쟁력으로 꼽힌다. 연구실에서 개발한 소재를 실제 고객사가 요구하는 품질 수준으로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연구실에서 몇 그램 수준으로 신소재를 합성하는 것과 이를 수십t(톤) 규모로 양산하는 것은 전혀 다른 기술”이라며 “켐트로스는 연구개발 성과를 실제 양산으로 연결할 수 있는 공정 설계와 생산 노하우를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회사는 향후에도 반도체 소재와 이차전지 소재를 양대 성장축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AI 산업 성장에 따라 두 사업 모두 중장기적인 수혜가 예상된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EUV용 초고순도 소재를 비롯해 수전해 소재와 바나듐 레독스 흐름전지(VRFB) 등 차세대 분야 연구도 확대하고 있다.
이 대표는 “기술 패권 시대에는 결국 초격차 기술이 경쟁력을 결정한다”며 “연구개발(R&D) 투자와 생산능력 확대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여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소재 국산화는 최근 반도체 업계에서 다시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화두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이 장기화되고 각국이 공급망 자립에 나서면서 핵심 소재를 특정 국가에 의존하는 구조 자체가 리스크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당시 포토레지스트와 고순도 불화수소 등 일부 핵심 소재의 공급이 불확실해지면서 반도체 공급망 전반에 긴장감이 높아졌다. 이후 정부와 업계는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국산화에 대규모 투자를 이어왔고, 일부 품목에서는 가시적인 성과도 나타났다.
이 대표는 이러한 흐름이 단순한 수입 대체 차원을 넘어 산업 경쟁력과 직결된 문제라고 평가했다. 그는 “소재 국산화는 단순한 수입 대체가 아니라 국가 산업의 생명줄을 지키는 일”이라며 “포토레지스트 핵심 소재인 폴리머 생산 기반을 유지하는 것은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 전체를 위한 투자”라고 말했다.

특히 반도체 소재 산업은 연구개발과 생산기반이 함께 유지돼야 한다는 특징이 있다. 생산라인이 사라질 경우 단순히 제조설비뿐 아니라 공정 데이터와 연구 인력, 기술 축적 기반도 동시에 약화될 수밖에 없다. 차세대 공정 대응을 위한 연구개발 역시 생산 현장을 기반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이 대표는 “국내 폴리머 생산은 미래 공급망 위기에 대비한 보험이자 백신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소부장 정책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긍정적이었다. 일본 수출규제 이후 확대된 정부 지원이 국내 기업들의 기술 개발과 국산화 시도를 뒷받침했다는 평가다.
다만 업계에서는 여전히 연구개발과 양산 사이의 간극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소재 기업들은 연구소 단계에서 기술력을 확보하더라도 실제 생산라인 적용과 고객사 인증 과정에서 상당한 시간과 비용을 투입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설비 투자와 반복적인 검증 절차가 요구되지만 관련 지원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 대표 역시 이러한 이른바 ‘죽음의 계곡(Valley of Death)’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장 많은 자금과 위험이 집중되는 구간은 오히려 양산화 단계”라며 “소부장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양산 전환 과정에 대한 정책 지원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단순한 연구개발 지원을 넘어 수요기업과 소재기업을 연결하는 방식의 정책 필요성도 거론된다. 국산 소재가 실제 양산 라인에 채택되기 위해서는 수요기업의 검증과 협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국산 소재를 채택하는 기업에도 보다 실질적인 인센티브가 제공될 필요가 있다”며 “소부장 정책 역시 자금 지원을 넘어 산업 생태계를 연결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