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몰리는 곳으로 간다’ 대기업들도 상생 행보

18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동묘 완구거리. 평일 아침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좁은 골목 사이는 이미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과거 어린이날이나 명절 직전에만 반짝 활기를 띠던 이곳에 최근 기이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완구거리를 가득 채운 이들은 유모차를 탄 아이들이 아닌, 양손에 커피를 든 2030세대 대학생과 직장인, 그리고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외국인 관광객들이다.
재미있는 점은 상권의 풍경이다. 가죽공방 가게도, 화장품 가게도, 심지어 옷가게도 저마다 매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말랑이(실리콘 등으로 만든 말랑한 장난감)’를 진열해 두고 있다.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말랑이가 동묘 완구거리를 통째로 집어삼킨 모양새다.
완구거리에서 문구점을 운영하는 홍진웅(50) 씨는 “오전부터 대학생들이 학교도 안 가고 여기로 몰려온다”라며 웃어 보였다. 홍 씨는 “예전엔 중국인 관광객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대만, 일본, 미국인까지 다양하다”라며 “손님은 10배 가까이 늘었고 평일은 물론이고 주말에는 정말 발도 못 디딜 정도”라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학생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라며 “점심시간에는 직장인들도 한 손엔 커피, 다른 한 손엔 말랑이 쥐고 돌아다닌다”고 덧붙였다.

동묘 완구거리에서 말랑이 유행의 시발점이 된 '삼영사'의 이월용(70) 사장의 감회는 더욱 남다르다. 불과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이 시장에서 사람 구경하기가 어려웠고 학교 앞 문방구 같은 소매점 주문까지 끊겨 장사를 접을 고민을 했다고 한다.
“가장 장사 안된 날과 가장 장사 잘된 날 매출을 비교해 보면 50배 정도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가게 운영 자체가 안 돼서 임대료가 4개월이나 밀렸었는데 이게(말랑이) SNS에서 유명해지면서 반전이 일어난 거다. 요즘은 다리 뻗고 잔다"고 기쁨을 표했다. 이어 이 씨는 “장사가 안돼서 문 닫는다고 앓는 소리 하던 주변 상인들이 싹 없어졌다”며 “이제는 말랑이를 안 팔던 가게들도 다들 가져다 놓고 판다”"라고 말했다.
동묘뿐만 아니다. 빈대떡과 육회로 유명한 광장시장, 한방 약재 시장인 경동시장 역시 젊은 세대의 필수 방문 코스로 자리 잡으며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온라인 쇼핑의 급성장으로 백화점, 마트, 아웃렛 등 기존 오프라인 대형 쇼핑몰의 방문객이 눈에 띄게 감소한 것과는 정반대의 행보다.

전통시장이 단순한 상품 구매처를 넘어 대체 불가능한 ‘체험 및 콘텐츠 플랫폼’으로 진화하자 희소해진 오프라인 집객 공간을 찾던 대기업 유통업체들의 시선도 일제히 전통시장으로 향하고 있다.
과거 대기업과 전통시장은 ‘골목상권 침해’라는 해묵은 갈등의 공식 속에 있었다. 대형마트 익일 배송과 의무휴업 제도가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전통시장이 강력한 오프라인 유동인구를 흡수하는 매력적인 상권으로 부상하자, 이제는 사람이 몰리는 시장으로 대기업이 찾아오는 ‘구조적 역전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2022년 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에 들어선 ‘스타벅스 경동1960점’이다. 스타벅스는 1960년대 문을 연 옛 경동극장을 리모델링해 매장을 선보였고 이곳을 찾은 젊은 층과 외국인 관광객이 자연스럽게 시장 골목으로 유입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과거에는 상권 침해의 주범으로 경계 대상이었던 대기업 브랜드가 지금은 시장 상권에 젊은 피를 수혈하는 핵심 집객 시설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흐름을 이어받아 CJ올리브영(올리브영)은 올해 4월 서울 광장시장 주단부 2층에 244평 규모의 ‘올리브영 광장마켓점’을 오픈했다. 한국인의 일상 문화를 체험하려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수요를 겨냥한 매장이다.
올리브영은 시장 고유의 색깔을 해치지 않기 위해 1960년대 상점에 K뷰티를 입힌 ‘올영양행’ 콘셉트를 도입했다. 매장 인테리어를 복고풍으로 꾸미고 광장시장의 대표 먹거리인 김부각이나 건과일 등의 스낵류는 취급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청귤, 자작나무, 당근 등 자연 원료를 주제로 한 '원물큐레이션존'을 꾸몄다. 전통 원단을 비치해 퍼스널컬러를 진단할 수 있도록 한 서비스나 한복 레트로 포토존은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맞춤형 콘텐츠다.

물류 대기업과의 공생 실험도 활발하다. CJ대한통운은 최근 대전 태평시장에 ‘장보기 배송 서비스’를 도입했다. 소비자가 시장에서 구매한 상품을 접수처에 맡기면 집까지 배송해 주는 시스템이다. 대형마트나 온라인 쇼핑의 편리함에 익숙한 소비자들의 불편을 해소해 전통시장의 경쟁력을 현대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취지다.
다만 대기업 브랜드의 진입과 일시적인 팝업 열풍이 시장 상인 모두의 실질적인 매출 증대로 이어지기 위해선 풀어야 할 숙제도 많다. 업종에 따른 낙수효과의 온도 차가 크기 때문이다.
광장시장에서 만난 상인 김필재(69) 씨는 “올리브영이나 스타벅스가 들어오면서 젊은 사람이나 지나다니는 행인은 확실히 많아졌다”라면서도 “하지만 실제 장사는 작년보다 안 된다. 외국인들이 와서 기념품으로 김이나 동결건조 과일을 많이 사 가야 하는데 최근 글로벌 정세나 비행기 값 상승 때문인지 지갑을 잘 열지 않는다”라며 한숨을 쉬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전통시장을 단순한 보호 대상이 아니라 지역 기반의 생활·관광 플랫폼으로 육성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라며 “기업과 전통시장의 협업이 지속 가능한 생태계로 안착하려면 단순한 매장 입점을 넘어 시장 내 소상공인들의 상품·서비스와 정교하게 연계되는 상생 비즈니스 모델을 계속해서 발전시켜야 한다”라고 제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