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때마다 체질 바꾼 삼성 DNA 재가동
“조직부터 바꿔야 산다” 33년 만에 다시 나온 혁신론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AI 반도체 호황에 힘입어 반등의 발판을 마련한 삼성전자지만, 이재용 회장의 시선은 오히려 더 짙은 위기의식을 향하고 있다. 33년 전 아날로그 체제에 안주하던 삼성을 글로벌 탑티어로 도약시킨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처럼, 이제는 “조직 DNA를 송두리째 바꾸라”는 이 회장의 특명이 그룹 전체의 AI 대전환을 견인하는 모양새다. 재계가 이번 전사적 AX(AI 전환) 조치를 두고 글로벌 AI 패권 경쟁에서 승기를 잡기 위한 ‘제2의 신경영 선언’으로 해석하는 이유다.
9일 재계에 따르면 이번 변화는 1993년 이 선대회장이 주도한 신경영 선언 이후 최대 규모의 조직 혁신으로 평가된다. 당시 삼성은 일본 기업을 추격하는 제조기업에 머물러 있었지만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계기로 품질·조직·인재·사업구조 전반의 혁신에 나섰다. 1995년 경북 구미사업장에서 불량 휴대전화와 팩스 수십만 대를 공개 소각한 ‘애니콜 화형식’은 그 상징적 장면으로 꼽힌다. 이후 삼성은 반도체와 디지털 가전, 휴대전화 사업에 과감한 투자를 단행하며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번 AI 대전환의 배경에도 위기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AI 패권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기술력뿐 아니라 개발 속도와 생산성, 의사결정 효율성까지 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재계에서는 AI가 삼성의 다음 10년을 결정할 핵심 변수로 보고 있다. 과거 디지털 전환이 제품 혁신을 이끌었다면 AI 전환은 연구개발과 생산, 경영 체계 전반을 바꾸는 혁신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삼성은 위기 때마다 대규모 체질 개선을 통해 성장해 왔다. 1980년대 반도체 진출, 1990년대 신경영, 2000년대 디지털 전환, 2010년대 스마트폰 혁명이 대표적이다. 시장 환경이 급변할 때마다 기존 성공 공식을 넘어 새로운 성장 축에 선제적으로 투자하며 경쟁 우위를 확보했다.
특히 이번 AI 혁신은 이 회장 취임 이후 처음으로 그룹 차원의 경영 패러다임 전환을 공식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동안 대규모 투자와 미래 사업 발굴에 집중해 왔다면 이제는 조직 운영 방식 자체를 바꾸는 데 방점을 찍었다. 재계 안팎에서는 “신경영이 이건희 선대회장의 경영 철학을 상징했다면 AI 대전환은 이재용 체제의 첫 경영 혁신 선언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AI 대전환이 기술 도입을 넘어 조직 문화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도 신경영과 닮은 대목이다. 과거 신경영이 품질과 속도, 글로벌 경쟁력을 조직의 핵심 가치로 심었다면 AI 혁신은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과 업무 자동화, AI 활용 역량을 조직 전반에 내재화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삼성이 AI를 미래 사업이 아닌 생존 전략으로 규정한 만큼 향후 투자와 인사, 평가 체계 전반에도 변화가 뒤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재계 관계자는 “신경영이 하드웨어 중심의 디지털 시대를 대비한 선언이었다면 이번 AI 혁신은 소프트웨어와 데이터 중심 시대를 준비하기 위한 선언”이라며 “삼성이 다시 한 번 성공 방정식을 써 내려갈 수 있을지가 한국 산업계 전체의 관심사”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