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민간통상외교 존재감 키워
정의선, 美ㆍ日ㆍ중동 산업협력 박차
구광모, 가전ㆍ배터리 현장 경영
신동빈, 美ㆍ日ㆍ동남아 거점 재정비
김동관, 美ㆍ중동ㆍ동유럽 방산협력

올해 국내 주요 그룹 총수들의 해외 일정은 단순한 ‘출장 기록’이 아니다. 각국의 관세 정책과 안보 협력, 공급망 재편 논의가 한꺼번에 얽히는 글로벌 지정학의 중심에 총수들이 직접 뛰어드는 ‘하늘 외교(air diplomacy)’가 본격화했다는 신호다.
미국 대선 이후 통상·안보 환경이 급변하고, ‘글로벌 사우스’가 새로운 개척 시장으로 떠오르는 가운데, 이들의 발걸음은 단순한 기업 의사결정이 아닌 ‘국가 전략’에 가까운 위치에서 움직였다. 주요 총수 모두가 올해 2~3대 전략 거점을 최소 두 차례 이상 방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올해 사법 리스크를 털어낸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미국·중국·일본·중동을 오가며 글로벌 경영에 시동을 걸었다. 각국 정상급 인사와 글로벌 빅테크 경영진을 직접 만나며 세일즈 외교를 폈다. 이 회장의 광폭 행보는 반도체, 전장 등 굵직한 수주로 이어졌다.
3월 ‘국제공상계 대표 회견’ 참석 차 중국을 찾은 이 회장은 베이징과 선전의 샤오미 전기차 공장과 비야디(BYD)를 방문했다. 이후 삼성전기는 비야디와 수천억원 규모의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공급 계약을 따냈다. 4~5월에는 일본을 두 차례 방문해 반도체·스마트폰 공급망을 점검했다.
하반기에는 미국을 중심 무대로 삼았다. 7월 초 미국 ‘선밸리 콘퍼런스’에서 글로벌 빅테크 경영자들과 회동한 이 회장은 보름 만에 한미 관세 협상 측면 지원을 위해 워싱턴DC로 출국했다. 그는 미국에서 17일간 체류하며 비즈니스 협력을 다졌다. 삼성전자는 이 회장 출장 전후로 테슬라, 애플과 대규모 수주 계약을 성사했다.
8월 말 한미 정상회담 경제사절단에 동행한 이 회장은 한미 경제계와 교류를 넓혔고, 10월에는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미일 경제대화에 참석한 뒤 곧바로 미국 플로리다로 날아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골프 회동을 했다. 지난달에는 이재명 대통령의 아랍에미리트(UAE) 순방을 계기로 마련된 ‘한-UAE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BRT)’에서 인공지능(AI) 관련 경제 협력 확대를 논의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올해 미국과 대만을 중심으로 AI·반도체 공급망 협력에 집중하는 한편, 경제단체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병행하며 주요국 정재계 인사들과의 접점을 넓혔다.
최 회장은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5에 참석해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만나 핵심 협력 분야인 고대역폭메모리(HBM)와 피지컬 AI 협력을 논의했다. 4월에는 대만 반도체 업체 TSMC를 찾아 6세대 HBM 제품인 ‘HBM4’ 개발 현황을 점검했다. 최 회장이 직접 엔비디아-SK하이닉스-TSMC로 이어지는 삼각 협력에 힘을 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서의 경제 외교 행보도 이어졌다. 2월 말에는 민간 경제사절단을 꾸려 미국 워싱턴에서 대미 아웃리치 활동을 전개했고, 트랜스퍼시픽 다이얼로그(TPD)에 참석해 한미일 3국의 AI·에너지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8월에는 한미 정상회담 경제사절단으로 워싱턴을 다시 찾으며 정재계 교류를 이어갔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올해 미국·일본·중동을 연속 횡단하며 통상 외교 전면에 섰다. 트럼프 미 행정부의 자동차 관세 재편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조정 국면에서 조지아 공장 투자, 백악관 면담, 중동 수소·에너지 협력까지 직접 챙겼다.
시작점은 ‘관세 리스크’였다. 2월 미국 방문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장남 트럼프 주니어와 골프 회동 후 조지아 생산거점과 IRA 대응 전략을 점검했다. 3월 워싱턴 백악관에서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후 국내 기업인 중 처음으로 총액 210억 달러(약 31조 원) 규모의 미국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같은 달 조지아 엘라벨에서는 ‘현대자동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준공식을 열어 관세 변수에 대응한 대규모 현지 생산 기반을 확보했다.
관세 협상이 급물살을 탄 7월 말에도 워싱턴을 다시 찾아 정부 협상 라인을 지원했다. 10월에는 일본 도쿄 한미일 경제대화에 참석한 뒤 곧바로 미국 마러라고로 이동해 트럼프 대통령과의 골프 회동에 다시 합류했고, 한미 관세 조정전을 후방 지원했다. 같은 달 사우디 리야드에서는 빈살만 왕세자와 단독 면담을 진행하고 현대차 사우디 생산법인(HMMME) 현장을 직접 챙겼다. 11월 UAE 일정에서는 경제사절단에 동행해 한-UAE 산업 협력 채널 강화에 힘을 실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올해 동남아 지역을 중심으로 가전·배터리·전장 등 그룹 핵심 사업의 해외 거점을 직접 점검하는 데 집중했다.
첫 해외 출장지는 인도였다. 구 회장은 2월 인도 벵갈루루 소프트웨어연구소와 뉴델리 인근 노이다 LG전자 생산공장을 방문했다. LG그룹 총수의 인도 방문은 2004년 구본무 선대회장 이후 20년 만이다. 인도 진출 30년을 앞둔 시점에서 연구개발(R&D)과 생산 현장을 직접 챙기며 현지 사업 전략을 점검했다. 인도 일정을 마친 뒤에는 중동·아프리카 지역 거점인 UAE 두바이로 이동해 관련 사업 현황을 살폈다.
6월에는 인도네시아 LG에너지솔루션과 현대차그룹 합작사인 HLI그린파워를 방문해 전기차 배터리 생산라인을 살폈다. 이어 LG전자 찌비뚱 생산법인과 연구개발 법인, 현지 유통매장을 둘러보며 생산·개발·판매로 이어지는 현지 완결형 체계를 점검했다. 8월에는 한미 정상회담 경제사절단으로 워싱턴을 방문했고, 10월에는 플로리다 마러라고에서 열린 트럼프 대통령과의 골프 회동에 참석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동남아 제조 거점을 재정비하는 데 주력했다. 2월 롯데웰푸드 빙과 신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인도 식품 생산 거점을 점검했고, 4월에는 인도네시아 신정부 경제사절단 단장을 맡으며 정부·재계 협력 채널을 관리했다.
10월에는 미국 롯데바이오로직스 시러큐스 바이오 캠퍼스를 방문한 데 이어 일본으로 이동해 일본 재계와의 네크워크를 다졌다. 11월에는 인도네시아 롯데케미칼 석유화학 단지 준공식에 참석하는 등 식품·화학·바이오를 아우르는 현장 경영을 이어갔다. 장남 신유열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부사장)도 미국, 일본 등을 바쁘게 오가며 경영 보폭을 키웠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은 사실상 ‘방산 특사’ 역할을 수행한 해였다. 1월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을 시작으로 2월 UAE 아부다비에서 열린 ‘IDEX 2025’ 방산 전시회에 직접 참석하며 중동 방산 협력의 물꼬를 텄다.
7~8월에는 미국 워싱턴에서 한미 관세 협상 국면에서 정부 협상 라인을 측면 지원하는 한편, 필라델피아 필리조선소 현장을 직접 점검했다. 필리조선소에서는 존 펠란 미국 해군성 장관과 백악관 러셀 보트 예산관리국장 등 미국 정부 고위 인사들를 만나 한미 조선업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해당 조선소는 8월 말 한미 정상회담 이후 이재명 대통령이 방문하며 주목받은 곳이다.
10월에는 폴란드·루마니아를 찾아 정부의 방산 특사단 일정에 동행했고, 같은 달 미국 플로리다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열린 트럼프 대통령과의 골프 회동에 초대받았다. 11월에는 UAE 국빈 방문 경제사절단에 합류해 방산 협력 논의를 이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