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광장_박덕배의 금융의 창] 게임이론으로 푸는 美 투자압박

입력 2025-10-12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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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책평가연구원 비상근연구위원/금융의 창 대표

합의된 투자액 실제론 감당 못해
조건부 협상이 장기·합리적 선택
단기충격 감수 … 경제구속 안돼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과 일본에 거액의 투자를 압박하고 있다. 일본보다 규모는 작지만, 한국에 요구된 3500억 달러는 현재 환율로 약 470조 원이다. 이는 한국 연간 예산의 3분의 2, 외환보유액의 80% 이상에 해당한다. 표면적으로는 관세 완화나 무역 갈등 해소의 대가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달러 패권을 지렛대로 한국 자금을 미국 투자로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단순한 협력이 아니라, 일단 자금이 묶이면 장기적 종속으로 이어질 위험이 내포된 요구다.

이 문제는 게임이론의 반복 게임 구조와 닮아 있다. 상대의 압박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협력과 응징의 균형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의 문제다. 한국이 취할 선택지는 세 가지다. 무조건 수용, 정면 거부, 조건부 협상이다. 단발적 거래라면 한국은 불리하다. 정면 거부는 보복을 감당하기 어렵고, 무조건 수용은 단기적으로 편해 보여도 장기적으로 종속을 고착화한다. 그러나 국제 관계는 단발이 아니다. 무역, 안보, 금융 협상은 내일도, 10년 뒤에도 이어진다. 오늘의 양보가 내일의 압박으로 돌아오는 이유다. 합리적 전략은 조건부 협상이다. 상대가 협력하면 협력으로, 압박하면 거부로 응수하는 ‘팃포탯(Tit-for-Tat)’ 방식이 균형을 만든다.

게임이론이 보여주듯, 반복되는 관계에선 ‘팃포탯’식 조건부 협력이 안정적 균형을 만든다. 중요한 것은 단번의 승부가 아니라, 매라운드의 신호를 통해 상대의 행동을 바꾸는 과정이다. 한국이 일관된 신호로 ‘협력에는 협력, 압박에는 응징’을 보낼 때 신뢰와 억지의 균형이 형성된다.

미국의 요구는 단순한 인프라 분담이 아니다. 알래스카 오일·액화천연가스(LNG) 인프라 건설 자본, 장기 구매계약, 그리고 우리가 보유한 외환을 매각해 다시 미국이 지정한 투자처에 재투자하는 조건이 결합된 패키지의 총액이 약 3500억 달러다. 외환보유액 대부분이 미국 국채로 구성되어 있어, 이는 사실상 한국의 외환자산을 다른 이름으로 돌려 쓰라는 뜻이다. 이렇게 큰 금액을 제시하는 것은 협상에서 흔히 쓰이는 ‘앵커링(anchoring)’ 전략이다. 처음부터 터무니없이 높은 요구를 던져놓으면, 이후 금액이 줄어도 상대는 여전히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이게 된다.

현실적으로 한국이 이 액수를 감당하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협상의 초점은 ‘돈의 크기’보다 ‘구조의 설계’에 맞춰져야 한다. 정부가 직접 자금을 투입하기보다는 수출입은행, 산업은행, 무역보험공사 등 정책금융기관이 보증·융자·지분참여 형태로 단계적 투자를 설계할 가능성이 높다. 겉으로는 대규모 투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부 부담을 최소화하며 시간을 버는 구조적 대응이다. 즉, 한국은 돈이 아니라 구조를 내는 방식으로 협상해야 한다.

설사 투자금이 회수되더라도 수익은 미국이, 위험은 한국이 지는 불평등한 구조가 될 수 있다. 이익은 나누지 않고 손실만 떠넘기는 게임이다. 그러나 이런 불균형한 구조 자체도 협상의 대상이다. 위험·수익 배분, 지분 참여, 보증 방식 등 세부 조건에서 균형을 재설계해야 한다. 이러한 조정 없이 요구를 수용한다면, 한국은 금융·에너지 의존에서도 깊은 구속을 피하기 어렵다.

조건부 협상을 택한다면 단기적 위험을 감수할 준비도 필요하다. 미국은 관세 보복이나 금융 압박, 안보 카드를 꺼낼 수 있다.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정치적 불안이 커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불안은 감당 가능한 영역이다. 한국의 외환보유액과 국제 협력망은 최소한의 방어선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불안은 되돌릴 수 있지만, 잘못된 협상은 되돌릴 수 없다. 그 불안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결국 우리가 함께 견뎌야 할 몫이다. 국가와 국민이 같은 방향을 보고 흔들림 없이 버텨낼 때, 불안은 위기가 아니라 통과의례가 된다.

결국 필요한 것은 전략적 냉정함이다. 투자 규모를 낮추고 집행 시기를 늦추며, 감당 가능한 범위 안에서 구조를 짜야 한다. 상대가 당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해 시간을 벌고, 정치적 협력은 유지하되 경제적 종속은 피해야 한다. 오늘의 작은 편안함이 내일의 큰 족쇄가 될 수 있다. 한국은 단기적 충격을 감수하더라도, 장기적으로 경제주권과 안보자율성을 함께 지키는 자주적 전략을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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