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압축성장이 한국 경제를 세계 제조강국으로 끌어올렸지만 그 그늘도 짙게 드리우고 있다. 반도체·배터리·자동차·조선 등 일부 주력 산업에 성장 동력이 집중되면서 산업 편중과 지역 간 격차가 심화했다. 글로벌 경기 변동이나 지정학적 리스크에 흔들리기 쉬운 불안정한 구조가 고착화됐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지금이 산업구조 전환의 골든타임”이라며 신성장동력 다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23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반도체 수출은 733억 달러(약 101조4800억 원)로 전년 동기 대비 11.4% 증가했다.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1.9%에 달했다. 지난해 연간으로는 반도체 수출이 1419억 달러(약 196조4600억 원)에 이르며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국내 증시에서도 쏠림은 뚜렷하다. 코스피 시가총액의 4분의 1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차지한다.
하지만 의존의 대가는 컸다. 업황이 꺾였던 2023년 반도체 수출은 986억 달러(약 136조5100억 원)에 그쳐 전년보다 23.7% 급감했다. 같은 해 전체 수출도 7.4% 줄며 무역수지가 2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반도체는 국내총생산(GDP)의 12% 이상을 차지한다. 조선업의 부침 역시 한국 경제 취약성을 드러낸 대표 사례다. 한국 조선업 수주량은 2015년 1099만CGT(표준선 환산톤수)에서 2016년 222만CGT로 80% 이상 급감했다. 이후 대규모 구조조정이 이어지며 종사자 수는 2015년 18만7000여 명에서 2022년 9만9000명대로 줄었다. 울산·거제 등 조선업 중심 지역은 국가 전체 성장률이 2.8%에 머물렀던 2016년에 오히려 역성장을 기록했다. 특정 업종 쏠림 현상이 경기 변동에 따른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가 드러난 셈이다.
제조업 강국 독일은 다른 길을 걸었다. 독일 역시 제조업 의존도가 높지만 산업 다각화로 위기를 흡수했다. 자동차·기계·화학 외에도 방산·바이오·우주항공으로 성장 동력을 확장했고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2023년 50%를 넘어 2024년에는 54%에 도달했다. 독일 정부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80%로 높이기 위해 전력망 투자와 규제 완화 정책을 추진 중이다. 반도체 공급망 강화 차원에서는 인텔과 TSMC 유치에 각각 99억 유로(약 16조 원), 50억 유로(약 8조 원)의 보조금을 약속했다. 인력 부족 문제에는 연간 40만 명 규모의 숙련 이민자 수용으로 대응하고 있다.
한국이 의존도를 낮추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방위산업·우주항공·바이오·해저케이블·전력망·친환경 선박·수소경제 등 다양한 산업으로 외연을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방산은 2022년 수출 173억 달러(약 24조 원), 2023년에도 130억 달러(약 18조 원)를 기록하며 수출 효자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정부는 2032년 달 착륙과 2045년 화성 탐사 목표를 내세우며 우주개발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바이오는 고령화와 팬데믹 이후 글로벌 수요가 커지면서 2040년 시장 규모가 4조 달러(약 5538조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초고압직류송전(HVDC) 해저케이블은 재생에너지 확산의 핵심 인프라로 LS전선이 네덜란드 테네트와 2조 원 규모의 프로젝트를 수주해 경쟁력을 입증했다. 조선업계는 액화천연가스(LNG)·메탄올·암모니아 추진선 등 친환경 선박에서 세계 선두를 지키고 있으며 해운업계도 2024년부터 시행된 유럽연합(EU) 탄소배출권거래제(ETS)와 국제해사기구(IMO)의 2050년 탄소중립 목표에 맞춰 투자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향후 구조개혁의 성패가 한국 경제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KDI는 우리나라의 구조개혁이 지연될 경우 2040년대 잠재성장률이 -0.3%까지 떨어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반대로 신산업을 적극 육성해 산업지형을 다변화한다면 0.5% 소폭 성장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내놨다. 결국 반도체·배터리의 성공 공식을 이어가되 방산·우주·바이오·수소경제 등으로 성장 축을 확장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KDI는 “경제 구조개혁을 통한 총요소생산성 개선에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며 “진입장벽 완화를 통해 생산성이 높은 혁신 기업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 경쟁을 제한하는 규제를 개선함으로써 생산성 향상의 유인을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