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산적 금융의 필요성에는 이견이 없다. 혁신기업과 첨단산업에 자금이 흘러 들어가야 한국 경제가 지속적인 성장동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도 자본규제까지 손질하며 '돈의 흐름'을 바꾸는 작업에 착수했다.
문제는 실행이다. 무리한 자금 공급은 은행의 건전성을 흔들고 금융시스템 불안으로 이어진다. 금융권 전체가 부담을 떠안는다면 생산적 금융은 해법이 아니라 또 다른 부메랑이 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규제를 풀기에 앞서 충격을 흡수할 안전판을 마련하고, 제도가 현장에 안착할 수 있는 기반을 함께 갖춰야 한다고 조언한다. 생산적 금융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금융권의 이익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규제 혁신도 동반돼야 한다고 했다.
24일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원화대출금 대비 부동산 대출 비중은 2020년 66.6%에서 2024년 69.6%로 상승했다. 명목 GDP 대비 비중도 같은 기간 62%에서 65.7%로 확대됐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은행의 건전성 중심 경영 기조가 강화되면서 담보 위주의 부동산 대출 쏠림은 한층 심화됐다. 이는 생산적 금융 전환을 가로막는 구조적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이윤수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부동산에 집중되는 나라일수록 성장률이 낮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며 "은행 입장에서는 부동산대출이 담보 기반이라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가치 평가도 쉬운 만큼 기업대출보다 우선순위가 높을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자금난에 내몰린 기업들은 답답하다. IBK경제연구소가 매출액 5억원 이상의 중소기업 4500개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올해 자금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는 응답 비중은 지난해보다 9%포인트(p) 상승했고 '경영상황이 호전될 것'이라는 답변은 23.1%로 늘었다. 자금만 원활히 공급된다면 성장과 투자 확대가 가능하다는 기업들의 자신감이 드러난다.
구본성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산업구조 개선이나 신성장 기반 육성을 위해서는 금융그룹 차원의 장기금융 및 투자금융 서비스 확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업들이 체감하는 금융 조달 여건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IBK 조사에서도 '신규 자금 조달이 전년보다 어려워졌다'는 응답이 28.3%로 전년 대비 1.6%p 상승했다. 금리 부담과 담보 요구 강화가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은행이 깐깐한 이유는 뭘까. 연체율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6월 말 은행권 중소기업 대출 연체율은 0.74%로 대기업 대출(0.14%)의 5배를 웃돈다. 금융시스템 안정과 은행 건전성을 지키려면 대출 문턱을 높일 수 밖에 없다.
최근 금융당국이 은행의 위험가중치(RW)를 조정하면서 73조5000억 원의 투자여력이 확보됐지만 이 돈이 생산적 영역으로 제대로 흘러가려면 은행이 기업의 성장 가능성과 기술력을 정밀하게 평가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이윤수 교수는 "정부의 기업대출 활성화 정책과 함께 은행도 기업 가치 평가 역량을 강화하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생산적 금융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단순히 한계기업의 연명을 돕는 방식이 아니라 경쟁력 있는 강소기업을 선별해 집중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병준 서울대 교수는 "폐업 위기 중소기업·소상공인에게 지원금을 주는 방식은 근본 치료가 아닌 일시적 통증 완화에 불과하다"며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규제 개선도 이와 맞닿아 있다. IBK경제연구소가 중소기업·소상공인 500곳을 대상으로 '새 정부에 바라는 점'을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69.8%가 '정책자금·신용공급 확대'를 최우선 정책 과제로 꼽았다. 이어 △중소기업 세제 혜택 확대(68.8%) △성장단계별 자금 지원(31.5%) △중소기업 상생금융지수 도입(21.3%) △판로 확대 세제지원 강화(8.8%) 순이었다.
은행이 새로운 수익원을 찾아 생산적 금융에 꾸준히 자금을 투입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디지털 금융 및 핀테크 혁신 흐름에 관련 사업 확장을 가로막는 낡은 규제를 걷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김완중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산업과 금융의 연결고리를 막아온 칸막이 규제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면서 "시장 기능을 활성화하고 시중 자금이 보다 생산성 높은 곳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단계별 맞춤형 금융지원과 투자·세제 인센티브 패키지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