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신사업도 정책 연속성 실종⋯美, 핵심산업 추가 관세 가능성 커
사실상 경영전략 수립 마비 상태⋯경영시계 ‘먹통’…“계획 자체 무의미”
AI 기술 변화부터 관세까지, 초불확실성 확대, 경영전략 수립 마비상태

기업 경영의 기본 전제는 ‘예측 가능성’이다. 기업인들이 그 어떤 리스크보다도 가장 두려워하는 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현실이다. 최근 한국 기업이 맞닥뜨린 상황이 바로 그렇다. 불확실성이 일상이 되고 기업의 전략 수립 주기가 무의미해지는 현상은 ‘위기’를 넘어 ‘마비’에 가깝다.
정부와 정치권은 기업에 손을 내미는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발목을 잡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4대 그룹 총수들과 연이어 회동을 갖고 기업 친화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돌아선 국회와 정책 라인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를 담은 상법 개정안이 공포된 지 채 일주일도 안 돼 더 강도 높은 개정안이 법안소위를 통과했고,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조법 개정안도 하루 만에 소위와 전체회의를 줄줄이 통과했다. 세제개편안에는 법인세 인상 방침까지 다시 포함됐다.
정치적 엇박자는 투자 결정의 시계를 흐린다. 공급망 안정화나 규제 완화 등 기업 활동에 있어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은 뒷전으로 밀리고 오히려 기업은 노동 리스크와 거버넌스 리스크를 감당해야 할 위치에 내몰리고 있다. 정부가 주도하는 신산업 전략도 체계적인 정책 연속성 없이 개별 사업자에 의존해 추진되는 형국이다. 중장기적인 예측력과 회복탄력성의 기반이 붕괴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기업들은 인공지능(AI) 기술의 초고속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술 변화 자체보다도 그에 맞춘 정책·제도적 뒷받침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대외환경도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미국의 상호관세가 현실화되고, 반도체 등 핵심 산업을 겨냥한 추가 관세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한국은 동맹이지만, 공급망 파트너로서 미국 기준을 맞춰야 한다”는 논리는 앞으로 더 거센 ‘내놓으라 압박’으로 돌아올 수 있다. 예측 불가능한 통상 정책, 변동성 높은 글로벌 공급망, 전략 자산에 대한 통제 가능성은 한국 기업의 경쟁력을 뿌리부터 흔드는 요인이다.
경제학계와 연구기관에서도 정책의 불확실성 자체를 가장 큰 리스크로 지목하고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지난 4월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세 계획으로 인한 불확실성이 관세 자체보다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자본시장연구원 역시 최근 보고서에서 “무역정책 자체보다 불확실성의 충격이 한국의 GDP를 더 크게 흔든다”고 분석했다. 예측 불가능성이 기업의 투자·고용·연구개발에 미치는 파급력은 단순 비용 증가보다 더 광범위하다는 의미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규제와 정책 방향 변화 자체가 가장 큰 경영 애로라고 밝혔다. 예측 가능성이 사라진 환경에선 어떤 전략도 작동하기 어렵다는 현실 인식이 반영된 결과다.
기업은 일자리의 기반이고, 기술의 축이며, 세수의 원천이다. 이들이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다음 분기를 버티는 게 목표’인 경영을 반복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경제로 전이된다. 지금 필요한 건 ‘투자하라’는 말보다도 “기업이 예측 가능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이다. 기업을 불확실성 속에 내버려둔 채 기댈 곳 없는 벌판에 세워놓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구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