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6월 25일은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을 맞는 날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적으로 남침하며 시작됐다.
이날 북한군의 선제공격에도 여전히 '남침'과 '북침'이라는 용어가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이에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과 용어의 의미를 명확히 짚어본다.
'남침(南侵)'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침략한다는 뜻으로, 한국전쟁의 경우 북한군이 대한민국을 공격한 것을 지칭한다.
반면 '북침(北侵)'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침략한다는 의미로, 남한이 북한을 먼저 공격했다는 주장을 나타낸다. 이 두 용어는 전쟁의 책임 소재를 가르는 핵심적인 단어다. 그간 북한의 선전이나 잘못된 정보로 인해 북침설이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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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의 '한국전쟁사'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께 북한군이 '폭풍 작전'이라는 암호명 아래 38선을 넘어 기습 '남침'을 감행하며 시작됐다.
북한군은 소련의 T-34 전차와 중화기 지원을 받아 서울을 3일 만에 점령할 정도로 압도적인 전력을 갖췄다. 이는 치밀한 전쟁 준비의 결과였다. 대한민국 국군은 장비와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비상경계가 해제된 주말에 기습을 당해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
북침설은 북한이 전쟁 발발 직후 평양방송을 통해 "남한이 북침했기에 자위적 반격을 했다"고 주장하며 퍼뜨린 선전에서 비롯됐다. 이 선전은 이내 거짓으로 판명됐다.
1990년대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비밀문서와 학계 연구를 통해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명확해지면서다. 김일성은 1949년부터 소련을 수차례 방문해 무기 지원과 남침 허가를 요청했으며, 1950년 4월 스탈린의 최종 승인을 얻었다.
북한의 남침은 소련의 전략과 맞물려 있었다. 스탈린은 한반도 공산화를 통해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으며, 중국의 국공내전 승리와 소련의 핵무기 개발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었다.
당시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으로 군사력을 강화했지만 남한은 미군의 철수와 제한된 군사 원조로 취약한 상태였다. 당시 미국은 애치슨 라인 선언으로 한반도를 방위선에서 제외한 듯한 인상을 주었으나 전쟁 발발 직후 유엔을 통해 즉각 개입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 파병을 결의했다.
한국전쟁은 수백만 명의 사상자와 한반도 분단의 비극을 남겼다. 접경 지역은 전쟁 초기에 극심한 피해를 보았고 민간인 희생자 비율이 특히 높았다.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끝났지만 평화협정은 체결되지 않아 남북은 여전히 대치 상태에 있다.
한편 국가보훈부는 한국전쟁 제75주년을 맞아 이날 오전 대전 컨벤션센터에서 기념식을 개최한다. '영웅들이 지킨 나라, 이어 나갈 대한민국'을 주제로 열리는 이번 행사는 참전 유공자와 정부 인사, 주한 참전국 외교사절 등 1300여 명이 참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