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경제와 시장질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기대되지만
행동주의·투기자본 경영권 위협 가능성
순기능 살리기 위한 시범·유예 적용을

이재명 정부가 강력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상법 개정안이 입법 논의에 들어간 가운데 기업들은 한층 긴장하고 있다. 이번 개정안은 윤석열 정부 시절 폐기됐던 내용을 보완·강화한 형태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는 조항이 핵심이다. 사외이사는 ‘독립이사’로 명칭을 바꾸고, 대규모 상장회사의 집중투표제 의무화, 다중대표소송제, 전자주주총회 도입 등이 포함됐다. 감사위원 선출 시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3%룰’도 신설됐다.
10일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정부가 상법 개정에 속도를 내는 배경에는 한국 자본시장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돼 온 지배구조 취약성과 일반주주의 권익 소외가 있다. 법 개정을 통해 국내 기업의 지배구조를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외국인 투자자에게 신뢰받는 시장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구상이다.
문제는 속도와 강도다. 민주당은 빠르면 오는 12일 국회에서 상법을 처리, 대통령 공포 후 즉시 시행을 예고한 바 있다. 하지만 당내 내부 이견 때문에 처리 일정을 다소 연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의 의지도 확고하다. 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기존 안을 더 세게 보완해야 한다”며 “취임 후 상법 통과까지 한 달도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기업 현장에선 우려가 크다. 최근 미국이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을 중심으로 중국산 제품에 고율 관세를 다시 부과하며 자국 산업 보호에 나선 것과 달리, 한국은 내부 규제 강화라는 정반대의 길을 택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글로벌 경쟁 격화 속에서 규제 강화는 산업 경쟁력을 갉아먹는 역주행일 수 있다”고 꼬집었다.
가장 큰 쟁점은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다. 개정안은 이사의 책임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넓혀 경영 판단 시 주주가치를 우선 고려하도록 했다. 취지 자체는 투자자 보호와 경영 투명성 제고에 있지만, 기업들은 장기 전략이 단기 주주이익에 밀려 위축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연구개발(R&D)나 설비투자 등이 위축되고, 이사회가 소송을 의식해 의사결정을 회피하는 부작용도 발 생할 수 있다.
행동주의 펀드나 투기자본이 제도를 활용해 경영권에 개입할 가능성이 커진 것도 부담이다. 자사주 소각, 배당 확대 등 주주환원 요구가 재무 여건이 열악한 기업에는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 상장 기업들의 재무 여건은 여의치 않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의 평균 부채비율은 112.88%로 전년보다 높아졌다. 코스닥 상장사도 109.45%로 증가했다.
개정안의 골자는 ‘주주 보호’이지만, 상법은 상장사 뿐 아니라 비상장사에도 적용된다. ‘주주’ 개념은 여전히 불분명하고, 이에 대한 의무는 ‘충실’, ‘공평’, ‘보호’ 등 선언적 문구에 머물러 있다. 기업들은 이러한 포괄 규정이 경영 불확실성을 키우고, 소송 리스크를 증폭시킬 수 있다고 본다.
이사의 경영 판단이 형사 책임의 대상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누가 위험을 감수하며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하겠느냐는 회의론이 확산하고 있다. 기업가 정신 위축으로 이어져 산업 전반의 경쟁력 저하로 연결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상법개정안 입법이 속도전 양상을 띄면서 중견·중소 상장사들은 발등의 불이 떨어졌다. 제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시범 적용과 유예기간 설정 등 점진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상장사 규모나 업종에 따라 충실의무 확대 적용 시점을 탄력적으로 조정해야 제도의 연착륙도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상법 개정은 한국 자본시장의 구조적 문제인 지배주주와 일반주주 간 이해충돌, 지배구조의 후진성을 개선하려는 취지”라면서도 “기업 입장에선 경영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 순기능을 살리기 위한 정교한 설계와 점진적 적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