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트로한 디스코 음악, 흑백 영상미, 세계적인 패션모델 50명…
9일 자라(ZARA)가 선보인 영상입니다. 짧은 흑백 영상에서는 블랙&화이트 톤의 모던한 의상과 함께 자라의 로고가 빛나는데요. 올해로 출범 50주년을 맞아 색다른 캠페인을 진행하는 중이죠.
패션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포토그래퍼 중 하나인 스티브 마이젤이 주도한 이번 캠페인에는 슈퍼모델들이 등장합니다. 이리나 샤크, 아드리아나 리마, 캔디스 스와네포엘, 나오미 캠벨, 비토리아 세레티, 칼리 크로스, 최소라 등 톱 모델들이 카메라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해 눈길을 끌었는데요. 칼 템플러, 팻 맥그래스, 귀도 팔라우 등 모델들의 스타일링과 메이크업, 헤어를 담당한 이들도 패션 신에서 이름값을 하는 인물들이죠.
화려한 라인업의 캠페인은 자라가 출범 50주년을 맞아 '50년, 50 아이콘'(50 Years, 50 Icons)이라는 이름으로 선보인 겁니다. 전 세계 소비자들의 시선도 자라로 쏠렸죠. 자라가 50주년을 맞아 내놓을 컬렉션과 기념 이벤트, 세일 행사 등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요. 이와 함께 자라의 영향력까지 다시금 주목받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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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패스트패션 브랜드'로 운을 띄우면 '자라'라는 말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대표적인 입지를 자랑하고 있는 자라지만, 시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1975년 스페인 라 코루냐에서 첫 매장을 오픈한 자라의 전략 역시 별 볼 일(?) 없었는데요. 고급 브랜드 제품 디자인을 참고해 저렴하게 파는 것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불과 5년여 만에 자라는 남다른 성과를 냈습니다. 자체 생산부터 물류, 판매를 몽땅 책임지는 SPA(제조·유통 일원화) 구조를 확립하게 된 건데요. 경쟁 브랜드들이 수개월 걸려 진행할 일을 단 2주 만에 끝내버리면서 압도적인 속도전을 펼칠 수 있게 됐습니다. 패스트패션 개념을 탄생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수요 중심의 즉각적인 생산 구조를 갖추게 된 거죠.
1988년에는 모회사 인디텍스를 설립, 인근 국가인 포르투갈에 자라의 첫 해외 매장을 냈는데요. 이후 프랑스, 미국, 일본 등 세계 각지에 빠르게 진출했습니다. 한국에서는 2008년 4월 서울 명동에 첫 매장을 열었죠.
그렇게 자라는 매년 수십~수백 개의 새 매장을 오픈하며 SPA 대표 브랜드로 성장했고, 2010년엔 온라인 스토어도 개설하면서 글로벌 배송도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 패션 시장이 직격타를 맞은 2020년 코로나19 당시에는 매장 1200곳의 문을 닫는 긴축 경영에 돌입, 매출이 전년 대비 30% 가까이 급락한 204억 유로까지 고꾸라지는 위기를 맞았는데요. 오프라인 매장에 되레 힘을 실었습니다. 점포 수를 줄이더라도 매장을 더욱 화려하게, 아름답게, '인증샷' 찍기 좋게 만들었죠. 단순히 '옷 가게'가 아닌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한 게 위기에서 빠르게 탈출한 방법이었습니다.
지난해 1월 기준 자라는 전 세계 1811개의 매장과 410개의 자라 홈(ZARA HOME) 매장을 운영했습니다. 매장 수는 과거보다 줄었으나, 자라를 필두로 인디텍스는 지난해 사상 최고의 매출을 기록했죠. 전년(359억4700만 유로) 대비 7.5% 증가한 386억3200만 유로의 매출을 올렸다고 합니다. 이는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282억8600만 유로와 비교하면 36.58% 성장한 수치입니다.

사실 자라는 설립 연도만 놓고 보면 H&M, 유니클로보다 뒤늦게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기획부터 생산, 판매 등 모든 과정을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구조, 이른바 SPA 모델을 가장 먼저 정립한 패션 브랜드로 꼽히는데요. 자라의 빠른 공급망, 소비자 반응 기반 생산 시스템은 수많은 패션 브랜드들이 벤치마킹한 전략이기도 합니다.
전 세계 매장에서 수집되는 매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 소비자 반응을 곧바로 반영하는 것도 자라의 강점입니다. 잘 팔리면 빠르게 재생산하고, 반응이 없다면 곧바로 매장에서 철수시키면서 재고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구조죠. 과거엔 브랜드가 유행을 선도했다면, 자라는 오히려 소비자 반응을 따라 유행을 맞춤 생산하는 방식으로 차별화를 꾀합니다. 속도전과 날카로운 타깃팅, 이 두 가지가 자라의 핵심 동력인 셈입니다.
디자인 전략도 진화했습니다. 초창기엔 명품 브랜드 제품을 모방하는 데 그쳤지만, 지금의 자라는 인하우스 디자이너 팀을 강화하면서 소비자 데이터를 분석, 트렌드를 읽고 이를 감각적으로 재배치하는 브랜드로 거듭났죠. 미니멀한 디자인에 명품보다 부담이 덜한 가격대를 선보이면서 소비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최근 유행한 '조용한 럭셔리'(quiet luxury) 무드와도 잘 어울린다는 점으로, 자라는 젊은 소비자들 사이 실용적이면서도 힙한 선택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외 전략도 트렌드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자라는 온라인 스토어, 오프라인 매장 모두에서 모던한 브랜드 무드를 유지하는데요. 특히 매장에서 딥하우스, 일렉트로닉, 인디 팝을 선곡하며 젊은층 사이에서는 '음악 맛집'으로도 불립니다. 스포티파이, 유튜브 뮤직 등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에서는 '자라 매장 플레이리스트'가 높은 저장 수를 기록하고 있죠. 단순히 옷을 파는 공간을 넘어 감각을 소비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는 셈입니다.
50주년을 맞이한 9일엔 서울 명동 플래그십 스토어(주력 매장)를 새롭게 단장해 공개했는데요. 매장 안에 세부 컬렉션을 만나볼 수 있는 부티크 스타일의 공간을 마련했고, 온·오프라인 쇼핑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자라의 혁신 기술을 도입했습니다. 자라 모바일 앱을 통해 매장 내 상품의 위치나 재고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데다가 온라인에서 주문한 상품을 2시간 내 매장에서 픽업할 수도 있죠.
특히 3층에는 국내 최초의 자라 식음료 매장 자카페(Zacaffe)를 선보였는데요. 각 도시의 전통과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인테리어가 특징으로, 명동 눈스퀘어점은 서울의 감성을 담았습니다. 수정과 라떼, 모나카 등의 메뉴를 만나볼 수 있어 재미를 더합니다. 쇼핑과 휴식을 연결하는 라이프스타일 공간으로의 확장도 시도하는 중이죠.
이런 감각적인 전략은 협업에서도 드러납니다. 자라는 시즌마다 아티스트, 브랜드와 협업 컬렉션을 공개하며 주목받았는데요. 최근에는 중국 섬유 예술가 린팡루와 손잡고 전통과 현대를 잇는 특별 컬렉션을 론칭했습니다. 브랜드 특유의 미니멀한 감성에 스토리와 문화적 서사를 덧입히는 방식이었죠. 이에 앞서 3월엔 한국 컨템포러리 브랜드 앤더슨벨과도 협업, 남성 컬렉션을 선보였습니다. 서울 성수동에서 진행한 팝업스토어 방문 예약은 3시간여 만에 모두 마감됐고, 일반 공개 이틀 만에 인기 아이템 대부분이 완판됐죠. 당연히(?) 리셀 시장에서 웃돈이 붙어 거래되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11월엔 케이트 모스와 함께한 파티 캡슐 컬렉션을 출시해 화제를 빚었고요. 2019년부터는 향수 브랜드 조 말론 런던 창립자인 조 말론 CBE(대영제국 훈장) 여사와 손잡고 다양한 향수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죠.
자라는 '명품 카피'에서 시작해 지난 50년간 옷을 파는 방식, 유행을 만드는 속도, 쇼핑 공간의 역할까지 바꿔놨습니다. 빠른 기획력과 유통 시스템, 트렌디한 감각 위에 정교하게 설계된 경험을 더한 결과랄까요.
여기에 '지속 가능성'이라는 책임도 덧붙이고 있습니다. 자라는 2030년까지 사용하는 섬유의 100%를 친환경 소재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하고, 친환경 의류 라인을 론칭하는가 하면 모든 온라인 주문 포장재를 재활용 가능한 소재로 변경하는 등 친환경 인식에 발을 맞춰가고 있습니다. 물론 패스트패션 기업으로서 친환경 전환은 어려운 숙제입니다. 다만 빠르게 움직이는 법을 아는 브랜드이기에, 변화의 속도와 방향도 남다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데요. 자라의 다음 행보에 관심이 쏠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