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꽃의 다큐버스] 웃고, 울고, 연극하는 엄마들 향한 지지선언 '장기자랑'

입력 2023-03-3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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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꽃의 다큐버스] 타인의 삶을 가장 자세히 들여다보는 영화 장르가 다큐멘터리입니다. 누군가의 입장을 이해하는 게 갈수록 어려워지는 때, 사람을 쫓는 작품(Documentary) 속 지긋한 시선을 따라 우리 주변 세계(Universe)를 깊이 살펴보는 글을 씁니다.

▲'장기자랑' 스틸컷 (㈜영화사 진진)
▲'장기자랑' 스틸컷 (㈜영화사 진진)

“수학여행 때, 장기자랑 할 사람!?” 교복을 차려 입은 무대 위 주인공들 사이로 침묵이 감돌자 제안자는 성토한다. “아 뭐야~ 아무도 없어? 우리 반만 안 나간다고 생각해봐. 완전 ‘노잼’ 되는 거야!” 그제야 주변에서 망설이던 친구 몇 명이 히죽 웃으며 용기를 낸다. “이럴 땐 말이죠, 못 이기는 척 응해줘야 의리 아니겠습니까” 이내 모든 출연진이 입을 모아 밝은 목소리로 소리친다. “오케이, 콜!”

해맑은 고등학생 7명이 수학여행 장기자랑에서 제대로 한 판 놀아볼 준비를 하는 즐거운 과정을 다루는 이 연극 뒤에는,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다. 출연진 모두 9년 전 세월호에서 아이들을 떠나보내거나 가까스로 구출한 엄마들이라는 점이다. 이 중년의 여인들은 아이들이 입었던 안산 단원고등학교 교복을 걸치고, 어떤 사고도 없이 무탈하게 수학여행지인 제주도에 도착하게 되는 결말의 연극 ‘장기자랑’을 2020년 여러 차례 무대에 올렸다.

엄마들은 어떻게 이토록 밝은 연극의 주인공이 됐을까. 누가 극본을 쓰고 연출했으며, 무엇으로 각자의 비애를 감당하기에도 벅찬 이들을 매번 한 자리에 모아 웃고, 떠들고, 춤추게 할 수 있었을까. 연극의 존재를 알고 나면 필연적으로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소상히 들춰내는 다큐멘터리가, 다음 달 5일 극장 개봉하는 이소현 감독의 ‘장기자랑’이다. 2019년부터 3년간 촬영한 분량을 93분으로 편집한 결과물이다.

▲'장기자랑' 스틸컷 (㈜영화사 진진)
▲'장기자랑' 스틸컷 (㈜영화사 진진)

카메라에 포착된 엄마들의 연극 연습 과정은 의외로 유쾌하다. 예진 엄마 박유신과 영만 엄마 이미경이 주요 배역을 차지하기 위해 갈등하는 과정은 흥미진진 그 자체다. 남이 보기엔 사사로운 시기와 질투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무척이나 중대한 감정일 진데, 감독은 미처 예상치 못한 순간 두 사람 품에 불쑥 안겨드는 화해의 순간까지 재기롭게 교차시킨다. 덕분에 ‘장기자랑’은 ‘세월호’ 하면 자연히 떠올리게 되는 통곡과 호소 등의 아픈 이미지에서 과감하게 벗어난다. 담담하게, 때로는 당당하게 연극 연습에 나서는 엄마 개개인의 인간적인 특성을 비추고, 삶을 지탱하도록 도와주는 상호 관계성에 집중한다.

역설적인 건 관객이 그런 작품의 묘미에 푹 빠져들기 때문에 지독하게 잔인한 감정도 함께 경험하게 된다는 점일 것이다. 엄마들이 연극 무대에 오른 건 본질적으로는 가혹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이고, 어쩌면 쉬이 잊혀지는 듯한 아이들을 기억해달라고 말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아무런 걱정 없이 웃고, 떠들고, 소리치는 듯 보이던 연극의 시간 사이로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소리소문 없이 눈물을 떨구는 엄마들의 모습이 조용히 목격될 때, 관객은 앞선 장면에 몇 차례나 속없이 호호 웃고 말았던 자신의 가벼움을 책망하게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다큐 ‘장기자랑’은 엄마들을 특정한 참사의 ‘희생자’만으로 보지 않고, 여느 누구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삶의 고통을 ‘견디는 자’로서 바라보려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엄마들이 연극 배우가 아니라 바리스타가 되거나, 시니어 모델로 활동하는 과정을 담았다고 하더라도 전하고자 하는 말은 결국 비슷할 것이다. 그건 주어진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자에 대한 지지 선언이다. 영만 엄마 이미경이 작품에서 읊조리는 단정한 표현은 그 지지 선언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마저 끌어낸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수 있겠지. 엄마가 애 보내고 나서 뭐가 그렇게 좋아가지구 저렇게 하면서 살 수 있지? 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나는 더 멋지게 살고 싶을 때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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