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선] 새봄을 기다리며

입력 2019-02-0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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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학 저술가

설 전날이 입춘이었다. 태양의 황경이 315°에 오는 입춘에는 행운과 건강을 기원하는 입춘첩(立春帖)을 써서 대문에 붙인다. 입춘 무렵부터 양의 기운이 퍼지고 추위는 누그러진다. 올겨울은 눈도 비도 적게 내렸다. 파주에서 처음 맞은 작년 겨울에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화들짝 놀랐다. 폭설은 또 얼마나 잦았던가! 종일 눈보라가 몰아치고, 눈의 정적에 감싸인 채 날이 저물었다. 그렇게 맞은 파주의 밤은 저 먼 북방 고장의 밤인 듯 그윽한 겨울 정취를 맛보게 했다. 올겨울은 눈이 없어 내내 건조했다. 시베리아의 대륙고기압이 북서풍을 타고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메마른 추위가 이어졌다. 입춘이 지났건만 콧속으로 밀려드는 공기는 따갑고, 외투 깃 안으로 파고드는 바람 끝은 맵다.

어제는 집을 나와 출판단지까지 한 시간가량을 걸었다. 바람은 차갑고 하천은 얼어붙어 있었지만 걸을 만했다. 들길을 가로지르다가 자동차 바퀴에 으깨진 작은 새의 주검을 보았다. 검붉은 피가 바닥에 말라붙었다. 한때는 포릉포릉 날갯짓하며 힘차게 날았을 새. 죽음이 악덕 채권자같이 새에게서 비상한 솟구침과 활강을 회수해 갔을 테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생명을 지닌 개체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사태다. 생명은 무한 속에서 누리는 유한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만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타인을 환대하고, 사랑한다. 살아서 향유하던 지복(至福)은 죽음과 함께 덧없이 끝난다. 죽음은 존재의 기본 감각을 빼앗고, 영원한 부동성에 가둔다. 죽음의 때에 나를 도울 이는 없다. 죽음의 쓰디쓴 잔은 홀로 마셔야 한다. 들길에서 만난 작은 새 한 마리의 주검으로 인해 마음의 여린 부분이 쑤셨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살아 있음에 안도한다. 생에 감사해. 내게 준 많은 날들을, 눈으로 저 멀리 반짝이는 햇빛을 보고, 바람에 지날 때 마른 갈대가 서걱이는 소리와 헐벗은 대지가 내쉬는 한숨 소리를 귀로 들을 수 있음을, 내가 살아서 이 빛과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걷고 있음을.

어쩌면 올겨울은 이대로 큰 추위 없이 끝날지도 모른다. 갈참나무, 산딸나무, 단풍나무, 전나무, 소나무 따위가 어우러진 겨울 숲은 스산하고, 들은 황량한 잿빛 불모의 땅으로 누워 있다. 소리없이 봄비가 땅을 적시고 꽃눈이 터질 때, 개구리와 맹꽁이의 울음소리가 화음을 이루며 생명의 교향악으로 울려 퍼지던 들은 적막 속에서 마른 한해살이풀만 바람에 서걱거린다. 들판 한가운데 버드나무들은 잎 진 나뭇가지들을 뜻 없이 흔들고 서 있다. 겨울의 일몰은 빠르게 닥친다. 어둠과 추위는 몸과 마음을 시리게 한다. 겨우내 기분이 침울함에 빠진 것은 일조량이 준 여파인지도 모른다. 한파는 두개골을 위축시켜 상상력마저 가로막는다. 우리가 겨우내 몸을 웅크린 채 칩거하는 동안 숲속 식물들은 한파 속에서도 잎눈을 틔우고 꽃망울을 터뜨릴 시기를 엿본다.

봄은 달콤함에 견주자면 겨울은 악랄한 심술로 가득한 계절이다. 겨울마다 내면으로 침잠해서 계절성 우울증을 앓는다. 심각한 상태는 아니다. 겨울에 자주 여름날의 석양을 상상한다. 그러면 겨울에 찾아오는 계절성 우울증도 견딜 만하다. 나는 외부로 열린 문을 닫아걸고 고독 속에 유폐되는 것이다. 밤의 별채와도 같은 고독. 그리고 색채 없는 내면을 응시한다. 겨울이 지나면 꽤 많은 초고가 남는다. 고독의 전리품들. 그 초고를 오래 붙잡고 고친다. 책의 몸통은 고독이다. 글쓰기의 성분은 어느 정도 육체적이다. 육체를 동반하지 않는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모든 책은 고독의 피와 고독의 살로 이루어진다. “책 속에 있는 고독은 온 세상의 고독이다.”(마르그리트 뒤라스) 나는 뒤라스의 말에 공감한다. 봄이 오면 나는 새 책을 쓴다.

설 연휴 동안 집에서 꽤 두툼한 책을 읽었다. 햇빛이 잘 드는 창가 안락의자에 앉아 무릎에 담요를 덮고 알렉산드라 해리스의 ‘예술가들이 사랑한 날씨’란 책을 집중해서 읽었다. 영국의 날씨는 변덕스럽고 악명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날씨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며, 여러 문학작품에서 날씨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영국 버밍엄 대학교 영문과 교수인 저자는 셰익스피어에서 브론테 자매와 버지니아 울프를 거쳐 이언 매큐언에 이르기까지 수세기 동안 문학작품과 문헌들을 뒤져 계절과 날씨가 영국인의 감정생활에, 영국의 문화와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본다. 날씨와 기후는 우리의 심미적 감각을 자극한다.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바람은 어떤가? 여름철의 비와 뇌우는 어떤가? 바람은 날카롭고 음산한 신음소리를 내며 들판을 재빨리 통과하며 하늘의 구름을 이리저리 몰아간다. 바람은 비를 몰아오고, 더러는 폭풍으로 돌변한다.

에밀리 브론테는 ‘폭풍의 언덕’에서 “황량한 가시나무들이 마치 자선을 베풀어달라고 태양에 간구하는 것처럼 모두 한쪽 방향으로 쏠리는 정도를 보면 북풍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추측할 수가 있다”라고 묘사한다. 비가 감정을 내향적인 데로 이끈다. 전나무나 삼나무를 한쪽으로 휘게 만드는 북풍은 우리를 두려움과 불안으로 떨게 하며 움츠러들게 한다. 사람은 누구나 한 생을 사는 동안 너무나 많은 날씨들과 계절을 만난다. 봄바람, 폭우, 추위와 더위, 태풍, 홍수와 가뭄, 천둥과 번개, 안개, 서리와 얼음, 눈과 우박, 북풍과 폭설… 이렇듯 다양한 날씨들과 함께 우리 인생의 날들은 촘촘하게 짜인다. 궂은 날씨는 순탄하지 못한 인생의 은유로, 서리와 눈 덮인 소나무는 인생이 감당하는 시련의 은유로 적절하다. 날씨와 인생의 기억은 서로 얽혀 교직(交織)된다. 날씨가 인생의 상수(常數)는 아닐지언정 작은 변수가 되기는 할 테다. 윌리엄 쿠퍼는 “세상에 나쁜 날씨란 없다. 각기 다른 종류의 좋은 날씨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살아서 겪는 다양한 날씨는 우리 감각을 자극하고 밋밋한 상상력에 활기를 불어넣는 요소다. 날씨의 변화는 우리의 감정과 생각에 영향을 끼친다. 당연히 날씨의 변화는 우리 감정을 주무르고 우리를 새롭게 빚어내는 바가 있다.

입춘을 기점으로 차츰 날은 풀린다. 춘분 무렵 훈풍으로 봄기운이 땅에 퍼지며 꽃들이 다투어 피어난다. 음산한 북풍과 죽음을 무찌르고 마침내 봄은 온다. 생물의 활동량이 부쩍 는다. 태양이 천지간에 양의 기운을 북돋우고, 만물에게 생동감을 불어넣어 준 까닭이다. 곧 목덜미에 닿는 햇살이 따갑고, 촉촉한 습기를 머금은 흙냄새는 향그러울 테다. 봄날의 태양은 우리의 살과 피를 데우며 내면의 생명력을 고양시킨다. 그런 까닭에 봄마다 우리 메마른 가슴에 사랑이 샘솟고, 희망이 용틀임한다.

“무슨 목적으로, 사월이여 너는 다시 돌아오는가?/아름다움만으로는 족하지 않다./너는 더 이상, 끈끈하게 열리는 붉은색의/작은 잎사귀들로 내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다./크로커스의 뾰족한 끝을 지켜보는/나의 목덜미에 닿은 햇살이 뜨겁다./흙냄새가 좋다./죽음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사람의 뇌는 땅속에서만/구더기에 먹히는 것이 아니다./인생은 그 자체가/무(無),/빈 술잔, 주단 깔리지 않는 층계./해마다, 이 언덕 아래로,/사월이 재잘거리며, 꽃 뿌리며/백치처럼 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빈센트 밀레이, ‘봄’) 꽃을 시샘하는 반짝 추위가 닥치지만 겨울의 기세는 오래 가지 않는다. 빗방울이 떨어져 땅에 스민다. 땅에서 새순들이 돋고, 온갖 새들이 재잘거릴 때 봄은 사방에 꽃을 뿌리며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겨울을 이긴 장미는 어떻게 피어나던가? 자두나무는 어떻게 열매를 맺던가? 오, 겨울을 이겨내고 우리는 저마다 꽃망울을 터뜨리고 열매를 맺을 준비를 해야 한다. 시련의 연속이더라도 봄이 오면 나는 다시 살아봐야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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