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의 말] ‘자장면 값’ 우화로 본 누리과정

입력 2016-01-12 10:46 수정 2016-01-13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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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준 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 전 청와대 정책실장

시골 동네 노인들이 돈이 없어 점심을 먹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어떤 서울 사람이 지나가다 자장면을 시켰고, 잠시 후 ‘철가방’ 배달원이 자장면을 배달해 왔다. 자, 이 경우 자장면 값은 누가 내야 할까?

지방자치의 권위자, 충북대 강형기 교수가 낸 문제이다. 아니, 문제는 무슨 문제, 당연히 자장면 시킨 서울 사람이 내야지. 그런데 그게 아니다. 서울 사람 왈, 자기가 아니라 동네 사람인 ‘철가방’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철가방’인들 가만히 있겠나. “이게 무슨 소리냐? 못 낸다.”, “내라.” 큰 싸움이 되어 버렸다.

무슨 이야기인가? 서울 사람은 중앙정부, 노인은 복지 혜택을 받는 지역주민, 자장면은 기초노령연금이나 누리과정 등의 복지사업, 그리고 ‘철가방’은 중앙정부가 결정한 복지사업을 실행에 옮기는 지방자치단체나 시·도교육청이다.

누가 잘못되었나? 당연히 서울 사람, 즉 중앙정부이다. 말썽이 되는 누리과정, 그중에서도 특히 극한 갈등양상을 보이는 어린이집 지원만 해도 그렇다. 사업을 하자고 한 쪽, 즉 자장면을 시킨 쪽은 중앙정부이다. 그러면 돈을 내는 게 당연하다. 철가방, 즉 그 사업을 집행해 주는 시·도교육청에 돈을 내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중앙정부가 더 큰소리친다. 첫째로 돈은 줄 만큼 줬다는 이야기이다. 지방재정교부금에 다 들어 있다는 뜻이다.

이해가 잘 안 된다. 교부금은 인건비와 시설관리비 등 기본적인 지출을 감당하도록 하는 게 목적이다. 그것도 자율적 운영을 전제로 교부된다. 이런 돈으로 중앙정부가 결정한 대규모 의무지출 사업을 하게 해?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다. 자율적으로 써라 줘 놓고서는 곧바로 여기 써라 저기 써라 의무화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줬다고 해도 문제가 되고, 주지 않았다고 해도 문제가 된다. 주지 않고 줬다고 하면 거짓이 되고, 정말 줬다고 하면 교부금제도의 취지를 몰랐거나 훼손시켰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래저래 망신이다. 차라리 낯 두꺼운 ‘서울 사람’ 되는 편이 낫다.

둘째, 누리과정 사업이 법적 의무사업이라는 주장이다.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시행령에 시·도교육청이 내게 되어 있으니 잔말 말고 돈을 내라는 뜻이다. 그러지 않으면 직무유기로 몰아 감사도 하고 제재도 가하겠단다.

법과 영이라? 그것 만들 때 지방의회를 포함한 지방 쪽 의사결정 주체들의 동의나 의견을 구했나? 그러지 않았다. 기껏해야 교육감들과 협의한 정도이다. 그나마 어린이집 지원이 포함되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중앙정부와 교육감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중앙정부는 협의했다고 하고 교육감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 또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이런 게 관행이 되면 앞으로도 갖가지 의무사업이 지방자치단체와 시·도교육청의 행정과 재정을 파고들게 된다. 지방자치와 교육자치는 이름만 남게 되고, 국가 전체의 의사결정 체계 또한 그만큼 훼손될 수밖에 없다. 앞서가는 모든 국가가 분권과 자치를 강화하고 있는 상황, 정말 남이 알까 두렵다.

중앙정부 입장을 모르는 바 아니다. 복지수요 증가 등으로 돈은 늘 부족하다. 이런 가운데 시·도교육청 형편은 조금 나아질 것으로 보인다. 세수 증대로 내국세의 20.27%와 교육세 등으로 구성되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도 늘고, 담뱃세 세수가 늘어나면서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들어오는 돈도 늘어날 전망이다. 그만큼 누리과정 예산을 시·도교육청이 감당해 주었으면 할 것이다.

그러나 ‘철가방’의 수입이 늘었다고 해서 자장면 값을 낼 의무는 없다. 이런 것을 두고 억지를 부리면 안 된다. 법이다 감사다 하며 의무지출을 강요해서도 안 되고, 누가 먼저 항복하나 보자 식의 ‘치킨 게임’을 해서도 안 된다. 시·도교육청이 욕먹는 것을, 또 경기도와 수원시 등이 우선 급하게 돈을 내어 놓는 것을 이기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더욱 안 된다.

지방자치와 교육자치 정신을 반영한 해결책을 내어 놓아야 한다. 아울러 이 기회에 중앙·지방 간 재정배분의 틀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또 경기변동을 반영하는 세출구조를 어떻게 짤 것인지 등에 대한 고민도 시작해야 한다. 중앙정부면 중앙정부답게 행동하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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