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상상력에 세금을 부과하는 정부는 아직 없지만 산천에 흐르는 물을 병에 담아 돈을 받거나 지구의 산소를 상품화하고 있는 게 현실이니 해보는 말이다.
눈은 고요적적한 산중에도 내리고 달리는 자동차 바퀴자국에도 내린다. 높다란 아파트 지붕에도 내리고 달동네의 연탄재 위에도 내린다. 그러나 눈은 저 자신이 눈인지도 모르고 아직은 천지사방 무엇하나...
식민지 시인들아
사는 게 다 거기가 거기라고
쓰러지는 꽃들을 위로하지 말라
이렇게 불온한 시절도 가고 나면 그만
11월이여
나는 아직 더 갈 데가 있다
시집『달은 아직 그 달이다』에서
설악산 대청봉에 올해의 첫눈이 내렸고, 대관령에는 얼음이 얼었다.
아라파호족 인디언은 11월을 일러 ‘모두 다 사라진 건...
해가 지는데
어떤 아저씨가 내 속으로 들어왔다
먼 길을 걸어왔는지 바람의 냄새가 났다
아저씨는 바퀴처럼 닳았다
그래도 아저씨는 힘이 세다
아저씨라는 말 속에는
모든 남자들의 정처(定處)가 들어 있다
어두워지는데
어디서 본 듯한 아저씨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더 갈 데가 없었는지
제집처럼 들어왔다
‘아저씨’ 시집...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이 작두날 같은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개울물이 밤새 닦아놓은 하늘로
일찍 깬 새들이 어둠을 물고 날아간다
산꼭대기까지 물길어 올리느라
나무들은 몸이 흠뻑 젖었지만
햇빛은 그 정수리에서 깨어난다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이 산 밖에 삼겹살 같은 세상을 두고
나는 벌레처럼 잠들었던 모양이다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내가 한 철인제 북천 조용한 마을에 살며한 사미승을 알고 지냈는데어느 해 누군가 슬피 울어도 환한 유월그 사미는 뽕나무에 올라가 오디를 따고동네 처자는 치마폭에다 그걸 받는 걸 보았다그들이 주고받는 말은 바람이 다 집어먹고흰 웃음소리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걸북천 물소리가 싣고 가다가돌멩이처럼 뒤돌아보고는 했다아무 하늘에서나 햇구름이 피던...
이런 정경을 시인 권태응은 이렇게 노래했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식량이 되는 작물에서 피는 꽃은 대부분 소박하다. 꽃을 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감자꽃도 짙은 녹색 이파리들에 가려져 있는 듯 없는 듯 피지만 땅 속 감자 알까지 떠오르게 하는 선명하고 소박한 동시다....
너의 이파리는 푸르다
피가 푸르기 때문이다.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잎 뒤에 숨어 꽃은 오월에 피고
가지들은 올해도 바람에 흔들거린다.
같은 별의 물을 마시며
같은 햇빛 아래 사는데
내 몸은 푸르고
상처를 내고 바라보면
나는 온몸이 붉은 꽃이다.
오월이 가고 또 오면
언젠가 우리가 서로
몸을 바꿀 날이 있겠지
그게 즐거워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봄에 피는 꽃들은 대개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 알몸으로 피는 것이다.
그래서 더 화려하고 아름답다. 반갑다. 참으로 길고 암담했던 겨울의 끝에서 만난 꽃들이기 때문에 더욱 새롭고 반갑다. 2016년 겨울과 2017년 봄 사이,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의 함성과 탄식과 분노도 그 원인이 제거됨으로써 한결 차분해졌다. 얼마쯤의 평화와 여유를 되찾은 것이다. 봄을...
봄나무
나무는 몸이 아팠다
눈보라에 상처 입은 곳이나
빗방울들에게 얻어맞았던 곳들이
오래전부터 근지러웠다
땅속 깊은 곳을 오르내리며
몸을 덥히던 물이
이제는 갑갑하다고
한사코 나가고 싶어 하거나
살을 에는 바람과 외로움을 견디며
봄이 오면 정말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했던 말들이
그를 못 견디게 들볶았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의 헌데...
봄을 기다리며
겨울산에 가면
나무들의 밑동에
동그랗게 자리가 나 있는 걸 볼 수 있다
자신의 숨결로 눈을 녹인 것이다
저들은 겨우내 땅 속 깊은 곳에서 물을 퍼 올려
몸을 덥히고 있었던 것이다
좀 더 가까이 가 보면
잎이 있던 자리마다 창을 내고
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어디선가 “봄이다!” 하는 소리가 들리면
뛰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겨울에 둘러싸인...
감자를 묻고나서
삽등으로 구덩이를 다지면
뒷산이 꽝꽝 울리던 별
겨울은 해마다 닥나무 글거리에 몸을 다치며
짐승처럼 와서는
헛간이나 덕석가리 아래 자리를 잡았는데
천방 너머 개울은 물고기들 다친다고
두터운 얼음 옷을 꺼내 입히고는
달빛 아래 먼 길을 떠나고는 했다
어떤 날은 잠이 안 와
입김으로 봉창 유리를 닦고 내다보면
별의 가장자리에 매달려...
언 강을 내다보며
언 강을 내다보며 너를 기다린다
지난가을 첫서리 내릴 때쯤 떠난 황새를 기다린다
마을의 덕장에서는 황태들이 고드름처럼 몸을 부딪치며 울고
무섭게 춥고 긴 내설악의 겨울
나는 매일 얼어붙은 강을 내다보며 너를 기다린다
봄이 되면 오겠지
네가 오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지
시집 『뿔을 적시며』에서
겨울이 깊어간다....
옥상의 가을
옥상에 올라가 베갯속을 널었다
나의 잠들이 좋아라 하고
햇빛 속으로 달아난다
우리나라 붉은 메밀 대궁에는
흙의 피가 들어있다
피는 따뜻하다
여기서는 가을이 더 잘 보이고
나는 늘 높은 데가 좋다
세상의 모든 옥상은
아이들처럼 거미처럼 몰래
놀기 좋은 곳이다
이런 걸 누가 알기나 하는지
어머니 같았으면 벌써
달밤에 깨를 터는 가을이다...
틈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는
한겨울에 뿌리를 얼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바위에 틈을 낸다고 한다
바위도
살을 파고드는 아픔을 견디며
몸을 내주었던 것이다
치열한 삶이다
아름다운 생이다
나는 지난 겨울 한 무리의 철거민들이
용산에 언 뿌리를 내리려다가
불에 타 죽는 걸 보았다
바위도 나무에게 틈을 내주는데
사람은 사람에게 틈을 주지 않는다...
“나 바람나지 말라고 /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놓은/ 삼천 사발의 냉숫물”을 쓴 서정주 시인의 바람도 달이 다 내려다보고 있었을 터이고,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이 물레방앗간에서 동네 처녀를 쓰러뜨린 것도 달밤이었다.
출가한 딸이나 손 귀한 집 며느리의 수태를 빌던 것도 달이었으며 고난의 역사 속에서 징용 나간 남정네나 군대 간 아들의 무사귀환을 빌던...
결빙(結氷)
어느날 일기예보에서
영하 20도면 남자들은 오줌 누기가 어렵고
영하 40도면
하늘을 날던 새가 떨어진다고 한다
아! 영하 40도
그 깨끗한 하늘에서 떨어지고 싶다
시집
입추가 지났지만 더위는 수그러들 줄 모른다. 밤으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고 풀벌레 우는 소리가 또렷해지는 절기인데 늦더위는 아직도 기승이다.
시골에서는 마을...
함흥냉면
함흥은 없고 냉면만 남았다
함경남도 바닷가
집은 멀고 고향 잃은 음식이다
그해 겨울 눈 내리는 흥남에서
LST 타고 떠나온 뒤
함흥냉면에는 함흥이 없고
메밀이 들어 있다
못 가는 북방의 냉기처럼 서늘한
더운 날엔 혀가 기쁘라고
굵은 고추무거리에
푸덕한 명태 버무려 회를 얹은
잇몸을 간질이는 면발을 끊어내며
혀에 척척 감아 날래 먹고 나면
왠지...
감자밥
하지가 지나고
햇감자를 물에 말아 먹으면
사이다처럼 하얀 거품이 일었다
그 안에는 밭 둔덕의 꽃들이나
소울음이 들어 있었는데
나는 그게 먹기 싫어서
여름내 어머니랑 싸우고는 했다
시집 『뿔을 적시며』에서
지금은 제철 음식이 따로 없다. 시절을 앞당기거나 한참 지난 뒤라도 원하는 걸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보관기술도 발전했지만...
커피기도
커피점에 온 모녀가
커피가 나오자 기도를 한다
나는 보던 책을 내려놓았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기도는 길어지고
딸이 살그머니 눈을 떠 엄마를 살피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하느님도 따뜻한 커피를 좋아하실 텐데…
시집 ‘달은 아직 그 달이다’에서
언젠가 딸이 일하는 회사 지하 커피점에서 딸을 기다리다 만난 우연한 장면이다. 모녀의 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