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공간] 북천에서 생긴 일

입력 2017-07-0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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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시인

<흰 웃음소리>

내가 한 철
인제 북천 조용한 마을에 살며
한 사미승을 알고 지냈는데
어느 해 누군가 슬피 울어도 환한 유월
그 사미는 뽕나무에 올라가 오디를 따고
동네 처자는 치마폭에다 그걸 받는 걸 보았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은 바람이 다 집어먹고
흰 웃음소리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걸
북천 물소리가 싣고 가다가
돌멩이처럼 뒤돌아보고는 했다
아무 하늘에서나 햇구름이 피던 그날은
살다가 헤어지기도 좋은 날이었는데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온몸이 환해진다

- 시집 <뿔을 적시며>에서

학교 갔다 오는 길에 발돋움을 하고 뽕나무 가지를 휘어잡아 오디를 따 먹는다. 맛은 밋밋하지만 잘 익은 오디는 단맛이 난다. 그렇지만 아무리 먹어도 성이 차지 않는다. 오디는 작고 터지기 쉬워 손과 입이 피칠한 것처럼 검붉게 되고 잘못하여 옷에 묻으면 빨아도 지지 않는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는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오디 철이 가고 살구가 익는다. 북천 다리를 건너면 마당에 큰 살구나무가 선 집이 있었다. 이맘때면 황금처럼 누우런 살구가 마당에 지천이어도 누구 하나 줍는 사람이 없었다. 요즘은 돈과 물자가 흔하다. 그래서 무엇이든 살 수 있고 무엇이든 사 먹어야 맛있는 줄 안다. 그래서 살구나무는 살구가 익을 때만 기다리며 오며 가며 쳐다보던 동네 아이들이 그립고 아무것도 아닌 자신이 무안하고 슬펐을 것이다.

그 무렵 햇빛에 몸을 번쩍이며 흐르던 북천 강둑에서 어떤 사미승(沙彌僧)이 마을 처자에게 오디를 따주던 풍경이 실제 있었는지 아니면 나의 상상이었는지 확실치 않다. 시의 효과를 위해서는 그게 나의 문학적 상상력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부드럽고 환한 햇살 아래 사미승은 흰 얼굴에 안경을 썼던지 수줍고 정결한 풍경이지만 그날 사미는 행자(行者)로서 계(戒)를 두 개나 어겼다.

그가 지켜야 할 사미계 중에는 음행(淫行)을 하지 말 것과 때가 아니면 먹지 말라는 것도 있다. 그러나 살다가 헤어지기도 좋은 날, 대낮에 동네 처자에게 오디를 따주는 것을 음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한 움큼씩 따 먹어도 공복을 달래주지 못하는 오디로 끼니를 때웠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북천을 떠나온 지 오래되었다.

그 사미와 동네 처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쯤 청정비구(淸淨比丘)가 되어 수행에 여념이 없을까, 아니면 그 처자와 혼인하여 골짜기 어디쯤 펜션이라도 짓고 손님을 받고 있을까. 살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온몸이 환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소중하게 지켜가는 삶이나 사랑의 매일매일이 어느 해 봄날에 본 것 같은 그런 광경의 연속이거나 일부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주 세월이 많이 흐르면 그때 그 사미승이 나 자신이었다고 말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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