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1985년 당시 최고 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이 개혁의 일환으로 일정을 공식화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빼놓지 않고 매년 3월 전인대와 중국 최고 정치 자문기구인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를 개최했다. 이에 두 회의를 합쳐 ‘양회(兩會)’로 부른다. 또 1998년 이후로는 매년 3월 3일 정협을 개막하고 이틀 뒤인 5일 전인대를 시작하는 일정이 유지됐다....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의 일환으로 희토류를 전략 산업으로 키웠다. 그 결과 중국은 채굴량에서 세계 최대를 자랑한다. 중국산 희토류에 의존해온 나라 입장에선 그만큼 리스크가 크다는 의미다.
미국은 중국과 기술 패권을 다투고 있지만, 정작 희토류의 정제나 가공 기술 면에서는 중국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한때는 세계 최대 생산국이었으나 생산...
재벌을 어떻게 길들일까. ‘닥치고 응징’이 능사일까. 아니다.
중국 개혁.개방의 아버지 덩샤오핑. 1979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흑묘백묘론’으로 경제를 일으켰다.
지금 한국경제를 살리는 길은 ‘흑묘백묘’를 따질 때가 아니라 본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투명하게, 공개적으로 기업들에 해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자.
이후 열병식은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자인 덩샤오핑의 감독 아래 1984년 다시 시작됐다.
UC샌디에이고의 수전 셔크 중국 전문가는 “국경절 열병식과 축하행사는 중국 정권이 자국민과 전 세계에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시중하게 설계됐다”며 “과거 중국은 자본주의 정책을 공산주의 체제 아래 자라난 세대에 보여주고자 물질적 안락함을...
전에는 우리식 한자 발음으로 모택동(毛澤東), 등소평(鄧小平), 북경(北京), 남경(南京), 심양(瀋陽)이라고 적던 것을 지금은 ‘마오쩌둥’, ‘덩샤오핑’, ‘베이징’, ‘난징’, ‘선양’ 등 중국어 발음으로 적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우리의 지명이나 인명을 절대 우리 고유의 한국식 한자 발음으로 읽어 주지 않는다. 제주도는 ‘지저우따오’로 전주는...
덩샤오핑(등소평·鄧小平)은 1989년에 도광양회(韜光養晦) 즉 “빛을 감춘 채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르자”는 방침을 제시했고, 2003년에 후진타오(호금도·胡錦濤)는 ‘화평굴기(和平屈起)’ 즉 “평화로운 가운데 굽혔던 몸을 서서히 펴고 일어나자”는 지침을 내렸다. 최근 시진핑(습근평·習近平)은 ‘주동작위(主動作爲)’ 즉 “중국의 이익을 위해 주동적으로 행동하자”...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25일자 사설에서 “홍콩에서 폭동이 일어난 경우 개입하는 것은 중국 중앙 정부의 권한일 뿐만 아니라 책임이기도 하다”며 이런 상황에서 중국 정부의 행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전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의 발언을 상기시키는 견해를 나타냈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3일 미국 정보당국의 보고를 인용해, 중국 정부가 홍콩과의...
덩샤오핑 “농촌개혁 모범으로 삼자”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덩샤오핑 시대가 되면서 마침내 중국에 개혁개방의 길이 열렸다. 그런데 개혁개방은 단순히 덩샤오핑이라는 한 개인의 뛰어난 생각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샤오강춘 농민들의 실천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1980년 5월 31일 덩샤오핑은 샤오강춘에서 18인의...
아버지 동료들로부터 보살핌을 받다가 10대 시절 구소련에서 수리공학 관련 엔지니어 교육을 받았다.
덩샤오핑의 부상과 함께 정치적으로 지위가 상승해 1987년 에너지부 부장 등을 거쳐 1988년 총리에 임명돼 1998년까지 역임하고 나서 바로 전인대 상무위원장을 맡아 2003년까지 재임하는 등 권력을 누렸다.
덩샤오핑은 홍콩 반환 결정 때 ‘홍콩은 홍콩 사람이 다스린다’는 고도의 자치를 보장하면서 일국양제 원칙을 천명했지만, 시진핑이 집권한 이후 이 원칙은 급속히 와해됐다. 무엇보다도 시진핑 정권은 중국이 후진타오 주석 시절 홍콩에 약속한 2017년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약속을 뒤엎어버렸다.
홍콩 시민들이 특히 범죄인 인도법 개정을 두려워하는 데는...
중국의 장구한 역사에서도 오직 상앙 변법(變法)과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두 가지 개혁만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평가가 내려질 만큼 상앙의 개혁은 그 효과와 영향력이 엄청난 것이었다.
中 역사상 성공한 개혁 두 가지
상앙의 개혁은 상앙 변법으로 표현된다. 특히 상앙은 군사적 공적을 세운 자에게 벼슬을 주는 ‘20등작(等爵) 제도’를 시행했다. 그 이전에는 오직...
덩샤오핑(鄧小平)이 마오쩌둥(毛澤東)을 평하면서 썼다는 ‘공칠과삼(功七過三)’이 훨씬 현실 세계에 존재할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현실 속의 지도자는 공적과 과오가 섞여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높이 평가되는 인물은 과오에 비해 공적이 큰데, 그 반대의 인물은 공적에 비해 과오가 크다고 말하는 게 보다 사실적일 것이다. 그러니까 과오가 전부인 양 평가되는...
중국에서는 1978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덩샤오핑이 개혁을 시작하여 성과를 내고 있었다. 소련에서는 1985년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되어 개혁개방을 부르짖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86년 7월 레주언이 79세로 사망했다. 서기장직은 쯔엉찐이 승계했다. 쯔엉찐은 개혁을 주장하는 소수파 실용주의자였다. 12월 당 대회까지 5개월 동안 개혁개방 노선 투쟁을 주도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 중국에서 문화대혁명과 인민공사라는 인위적 압제에서 벗어나 개혁개방을 주창했던 덩샤오핑(鄧小平)은 사마천 사상의 충실한 계승자였다.
사마천이 찬양하는 화식가들은 모두 부유하면서도 덕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지혜와 노동으로써 부를 이루었고, 재산을 쌓아감에 있어 도(道)가 있었으며, 그것을 쓰는 데 도(度)가...
1980년대 중국을 개혁개방의 길로 이끈 덩샤오핑이 외교 방향으로 ‘28자 방침’에 이 말을 제시해 널리 알려졌다.
☆ 시사상식 / 경기후퇴(景氣後退, recession)
경기순환의 한 국면으로, 경기가 최고 호황기에서 최저 침체기에 이르기까지의 경제활동 수축과정을 말한다. 그 원인이나 경제활동이 어느 정도 수축했을 때이냐에 대해서는 설이 많다. 생산, 소비, 투자...
1978년 바로 이날 당시 중국 공산당은 ‘11기 3차 전체회의(11기 3중전회)’에서 당시 최고 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이 주창한 개혁개방 정책을 공식화했다. 많은 산업에서 사유화와 외국기업의 접근을 허용하면서 중국은 경제 고속성장의 길로 접어들었고 마침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경제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개혁개방 40주년을 맞아 최고...
18일(현지시간) 개혁개방 정책 추진 40주년을 맞는 중국이 그간 맹렬히 추진해 온 ‘양적 성장’ 대신 앞으로는 ‘질적 성장’에 매진한다며 달라진 비전을 제시했다.
17일 홍콩 명보(明報)에 따르면 중국공산당 싱크탱크인 중국사회과학원은 개혁개방 40주년에 맞춰 발간한 ‘발전과 개혁 청서(백서)’에서 앞으로는 중국이 ‘질적 발전’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을 40년 넘게 비서로 보필해온 측근 왕루이린(王瑞林)이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10일(현지시간)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부주임을 지낸 왕루이린이 지난 8일 베이징의 인민해방군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장례식은 당 지도부 묘역인 바바오샨혁명공원에서 치러진다.
SCMP는 왕루이린 지인의 말을...
특히 리카싱은 덩샤오핑(鄧小平)이 1980년대 초 개혁개방을 본격화한 후 중국에 처음으로 투자한 외국 기업인 중 한 명으로 개혁개방의 공신으로 불려왔다. 그는 100억 홍콩달러(약 1조4000억 원)를 기부해 광둥성에 산터우(汕頭)대학을 세우기도 했다.
리카싱은 덩샤오핑과 그 뒤를 이은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이번 메인 세션 강의를 맡은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조영남 교수는 현대 중국정치 권위자로 중국 경제개발의 초석을 닦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과 그것을 바탕으로 시진핑 정부가 꿈꾸는 미래 중국의 모습까지 투자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를 풀어나감으로써 참석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미래에셋대우 김대환 WM.연금지원부문 대표는 “미래에셋대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