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 해외수주 1000억달러]현대건설, 해외건설史의 산 증인

입력 2013-11-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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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은 국내건설업계로는 전무후무한 해외수주 1000억달러 달성을 이뤄냈다. 국내 해외건설의 역사는 현대건설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현대건설의 해외건설 실적은 다른 건설사들을 압도한다.

실제로 수주실적만 하더라도 2위권 그룹과 2배 이상의 격차를 보이고 있다. 이번 해외건설 수주 1000억달러를 계기로 그 동안 현대건설이 시공했던 현장중에서 기념비적인 곳들을 소개한다.

▲첫 해외수주 태국타파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 모습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1966~1968년)

현대건설이 처음 태국에 가지고 갔던 장비는 재래식 도로공사에서 사용하던 구식의 노후장비였다. 그나마도 절대다수가 부족했다. 불도저, 로더 등 일부 장비는 신제품을 구입하였는데, 기능공들이 사용방법을 몰라 석 달도 채 못 가 고장이 나버리고 말았다.

태국은 비가 많은 나라여서 모래와 자갈이 항상 너무 젖어 있어, 그대로 섞을 경우 함수량이 맞지 않아 아스콘이 제대로 생산되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을 2~3개월간 고심한 후에야 알아내어 건조기에 자갈을 넣고 말리려고 했으나 건조기 자체의 온도가 올라가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정주영 사장이 와서 보더니 ‘건조기에 비싼 기름 때 가면서 말릴 게 뭐 있느냐 골재를 직접 철판에 놓고 구워라’ 하고 지시했다. 과연 건조기를 이용할 때보다 생산능률이 2~3배까지 높아졌다.

당시 정주영 사장은 한 달이면 일주일은 태국에 와서 살다시피 했다. 기후 등 여러 가지 악조건으로 공사가 부진했기 때문에 그가 오면 으레 현장 직원들은 야단을 맞기 일쑤였다. 또한 토취장에서부터 현장까지의 작업로에는 운반하던 돌들이 몇 개씩은 떨어져 있기 마련인데, 그는 차를 타고 가다가 혹시 그런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차에서 내려 손수 돌들을 한쪽으로 치우곤 하는 통에 현장 직원들이 쩔쩔 맸다.

또 정주영 사장은 새벽 4시에 현장에 나와서 기계를 돌렸을 정도로 의욕이 강했다. 장사들도 기계를 돌리고 나면 몸이 덜덜 떨릴 정도이니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이처럼 정주영 사장이 솔선해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기술자들이 많은 자극을 받았다.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는 현대건설이 국제적으로 발전하고 진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공사였다. 비록 수지면에서는 상당한 적자를 보았지만, 세계 속의 현대로 성장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닦았다. 또한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시공경험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바렌인 아랍 수리조선소(1975~1978년)

바레인 아랍 수리조선소는 현대건설이 중동에서 수행한 최초의 대규모 공사이자, 1970년대 중동 건설 붐이 있게 한 모태이기도 하다.

공사 초기에는 중동 기후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식수가 부족해 콜라로 양치질을 하는 일도 있었고, 합판조각 위에서 텐트를 치고 지내다 12월부터 시작된 우기로 피해를 입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애를 먹은 것은 자연환경에 따른 골재 문제였다.

바레인 내륙지방의 석산에서 가져온 암석들은 석회질 성분이라 물을 머금으면 곧 흐물흐물해져 버렸고, 바다에서 퍼 올린 모래에는 이물질이 많아 여과 과정을 수없이 거쳐야 했다. 또한 모래와 개흙으로 이뤄진 매립지다보니 파일을 박는 일도 어려웠을 뿐더러, 배근한 철근들이 몇 시간 뒤면 바로 녹이 슬 정도로 습도가 높았다.

울산조선소를 통해 조선소 공사의 충분한 경험을 쌓은 후였지만 외국의 엄격한 기준과 규격을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아랍 수리조선소 공사는 특별했다. 품질관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한 당시 한국 건설문화 풍토에서 영국과 포르투갈로 이원화된 까다로운 감독은 다소 억지처럼 여겨질 때도 많았다.

처음엔 공기를 맞추느라 그들의 요구를 따랐지만 나중에는 우리나라 자재들을 추천해서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특히 해수공사에 사용하는 5종 시멘트의 경우, 단양에서 가져와 현장에서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영국 기술회사는 시멘트클링커 공장에 감독관을 상주시키고 매일 시멘트 품질을 검사했는데 단 하루도 불합격 판정을 받은 적이 없었다. 덕분에 우리나라 시멘트의 우수성이 알려지면서 나중에는 현지 업체들까지 시멘트를 사기 위해 줄을 서기도 했다.

◇사우디 주베일산업항(1976~1978년)

주베일산업항 공사에 소요된 모든 자재는 국내에서 조달해 해상으로 운송하였다. 한국에서 주베일산업항 공사 현장까지는 한번 오가는 데 35일이 소요되는 거리였다. 현대건설은 1만마력 예인선 3척, 2만톤 바지선 3척, 5만톤 바지선 3척으로 기자재 수송 작전을 펼쳤다. 8번째 항해 때 말라카 해협 싱가포르 앞바다에서 1호 바지선이 대만 국적 상선과 충돌하는 바람에, 그 위에 실은 자켓(Jaket; 하부구조물) 중 한 개의 파이프가 구부러지는 경미한 사고가 일어났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대만 앞바다에서 태풍으로 바지선 한 척을 잃어버리는 사고가 있었는데, 나중에 대만 해안에 고스란히 떠밀려가 있는 것을 끌어왔다.

이러한 두 번의 가벼운 사건 이외에는 큰 사고 없이 19번째 항해를 안전하게 마쳤다. 해양 수송 작전의 성공을 보고 발주처와 감독청에서는 놀라운 사건이라고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더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수심 30m나 되는 곳에서 파도에 흔들리면서 중량 500톤짜리 자켓을 한계 오차 5㎝ 이내로 설치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선진 외국의 건설사들도 일단 자켓 설치가 끝난 후에 그 간격을 재서 빔을 제작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만약 한계 오차가 5㎝만 넘어도 빔을 버려야 하는 판인데, 89개의 자켓을 한계 오차 내에서 완벽하게 설치함으로써 미리 제작해 놓은 빔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사용할 수 있었다.

◇쿠웨이트 슈아이바 항만 확장(1977~1980년)

슈아이바 항만 공사에서 처음으로 부딪쳤던 어려움은 중동에서의 모든 공사가 그러하듯이 골재 확보의 문제였다. 이 공사에 필요한 골재는 48만㎥, 블록기초 및 호안용 석재가 20만㎥나 되었는데 마땅한 석산을 찾을 수가 없었다. 쿠웨이트 업자들이 골재를 팔고 있기는 했으나 너무 비쌌다. 그래서 힘들더라도 직접 석산을 찾아야 했다.

2개월 동안 사막을 헤맨 끝에 마침내 골재원을 찾아냈다. 현장에서 150㎞나 떨어진, 이라크 국경에 위치한 곳으로 골재채취율도 10~20%에 불과했으나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고 덤프트럭으로 현장까지 실어 날랐다. 그런데 3개월 정도 지나자 쿠웨이트 정부로부터 골재채취 허가 취소통지가 날아왔다. 근처에 있던 쿠웨이트 업자들의 농간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되면 현대건설이 자기네 골재를 사서 쓸 줄 알았지만 그들의 비싼 골재를 쓰느니 차라리 주베일산업항 3호 석산의 돌을 들여다 쓰기로 했다. 3호 석산에서 현장까지의 거리는 300㎞, 게다가 국경을 넘어야 하는 까다로움이 있었으나 그래도 그 방법을 고수했다. 공사가 진척됨에 따라 석재의 물량이 늘어나자 UAE의 라스 알 카미스라는 곳에서 석재를 싼 값에 구입해 썼다. 이곳에서 현장까지의 석재운반은 주베일산업항 자켓 운반용으로 사용한 2만톤 바지선과 1만마력의 예인선을 이용했다. 이렇게 해서 석재는 공사를 마칠 때까지 별 문제없이 조달할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 페낭대교
◇말레이시아 페낭대교(1982~1985년)

페낭대교는 1985년 완공 당시만 해도 세계 세 번째로 긴 다리였으므로 입찰경쟁 당시부터 이미 건설 부문에 있어서는 세계적인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입찰에 참여한 회사만 해도 현대건설을 비롯하여 호주 1개사, 프랑스 5개사, 독일 3개사, 일본 13개사 등 세계 유수의 건설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각축전을 벌였다.

당시 가격 면에서만 따질 경우 입찰 참여회사 중 프랑스의 캄프농 베르나사가 최저입찰로 1위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현대건설은 그 회사보다 공기가 1년 빠른 3년으로 잡아 수주에 성공할 수 있었다. 가격을 내리지 않는 대신에 공기를 앞당겨, 1년의 통행료를 받게 될 경우 더 이익이 된다고 말레이시아 정부를 설득시킨 점이 주효했던 것이다.

“당시 정주영 회장님의 지론이 ‘사람을 만나는 일에 손해를 보면 안 된다’면서 늘 우리에게 ‘인사해서 돈 드느냐?’고 하셨지요. 말레이시아 총리 내외가 울산 현대자동차를 방문했을 때 정주영 회장님께서 직접 주스를 서빙했지요. 그랬더니 총리 내외가 깜짝 놀라는 거였어요. 그날 정주영 회장님은 마하티르 총리에게 포니 한 대를 선물했는데, 말레이시아에 가서 총리가 그 차를 그렇게 애용했다는 겁니다. 지금도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기념관에 가면 그 포니가 전시되어 있어요. 이처럼 당시 말레이시아 총리나 정부 관료들은 현대건설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이었어요. 페낭대교를 수주할 수 있었던 것은 공기를 3년으로 계획한 것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지만, 현대건설에 대한 좋은 이미지도 작용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당시 말레이시아 현대건설 지사에 근무한 김영환 지사장의 회고담이다.

◇싱가포르 창이 국제공항 2단계 매립(1993~1999년)

싱가포르 창이 국제공항 2단계 공사는 기존의 2개 활주로와 연하여 제3의 활주로를 만들기 위한 부지매립공사였다. 현대건설은 약 17년 동안 매립공사를 통하여 싱가포르 전체 국토의 6%에 해당하는 면적을 확장하는 데 공헌하였다.

기존의 실트폰드 매립공사는 시멘트고결공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뻘에 시멘트를 살포할 경우 시멘트 성분이 수분을 빨아들여 지반을 탄탄하게 만드는 공법이었다. 그런데 이 경우 시멘트가 너무 많이 소모되어 공사비 부담이 크기 때문에 매립 규모가 큰 공사에서는 경제적 손실이 너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때 현대건설 토목분야의 기술진은 새로운 실트폰드 매립공법으로 모래살포공법과 고강도 보강매트 포설공법을 병행하여 실시하기로 하였다. 모래살포공법은 실트폰드에 전체적으로 5㎝ 정도씩 모래를 깔아 침전시킨 후 그 위로 올라오는 수분을 제거하는 방법을 반복적으로 실시하여 연약지반을 단단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여러 번에 걸쳐 모래 살포를 4~5m 정도 했을 때였다. 이때는 모래 살포를 하기 위해 불도저가 들어가도 뻘 속으로 빠질 염려가 없었다. 따라서 불도저로 모래를 살포하면서부터 작업 시간은 많이 단축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실트폰드 중앙의 어떤 지점에서 모래를 살포하던 불도저가 한쪽으로 기우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순간 불도저를 운전하던 태국인 근로자가 재빠르게 뛰어내려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다. 불도저는 기울기 시작한 지 불과 몇 분도 안 되어 자취도 없이 뻘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자칫하면 인명사고로 이어질 뻔한 사건이었다. 모래 살포를 골고루 하였지만, 개중에는 뻘이 올라와 모래가 1m 정도밖에 덮이지 않은 곳도 있었다. 그런 곳에 불도저가 들어갔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한 지반이 내려앉으며 뻘 속으로 묻혀 버린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20만 달러 상당의 불도저 한 대를 뻘 속에 수장시키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창이공항 2단계 공사 중에서 실트폰드 매립공사가 끝난 것은 1997년 막 IMF사태가 일어났을 때였다. 이 사태로 인하여 건설회사마다 자금압박에 시달릴 때였고, 현대건설 역시 예외일 수 없는 사정이었다. 그런데 실트폰드 매립에 관한 신공법인 모래살포법 덕분에 현대건설은 2000만 달러 상당의 이득 효과를 보았다.

◇이란 사우스파 가스전 개발 4·5단계(2002~2004년)

사우스파 4·5단계 공사 현장에 플레어 스택(배출가스 연소탑)이 두 개 있었다. 그 중 한 개에 불이 붙었는데, 이것은 위급 상황이었다. 플레어 스택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경우 폐가스가 공장 파이프라인에 차오르면 거의 완성된 설비가 모두 폭파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플레어 스택 중 한 개는 동시에 시공, 시운전이 완료되어 가동이 되지 않고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30분쯤 되자 불이 난 플레어 스택의 중간 부분이 부러졌다. 소방차를 불러 일단 불을 끄기는 했으나, 망가진 플레어 스택의 설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일단 발주처 관계자들을 만나 예정 공기에 지장 없이 앞으로 100일 만에 복구시키겠다는 약속을 하여 안심시킨 후 플레어 스택의 설계부터 바꾸는 작업을 하였다. 설계에서부터 자재 발주까지 모든 것을 1주일 만에 끝냈다. 약 1000명의 인력이 동원되어 밤샘 작업을 한 끝에 이루어낸 성과였다. 외국 기업에 제작을 맡길 경우 시간이 너무 걸리므로 한국 엔지니어링 회사에 맡겨 플레어 스택 제작에 착수하였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발주하여 한국으로 공수하는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한국 엔지니어링 회사에서는 40일 만에 플레어 스택 제작을 끝냈다.

그러나 제작된 플레어 스택을 공사 현장인 이란까지 옮기는 것이 문제였다. 이 긴급 공수 작전은 육해공(陸海空)을 모두 활용하였다. 일단 먼저 김포공항으로 플레어 스택을 싣고 가서 러시아 수송기를 이용해 두바이 공항까지 갔다. 그리고 거기서 배에 싣고 이란 공사 현장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하여 사건이 일어난 지 100일 만에 불에 타버린 플레어 스택을 새롭게 제작하여 설치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2004년 12월 10일 플레어 스택에 불을 붙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이란 대통령도 현대건설의 시공능력을 칭찬해 마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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