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든 풀이든 사람이든 생명이 있는 것이면 자라기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싶겠지만, 그게 태어나는 생명체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마 선생님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어린 제자들을 위해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경우 태어나고 보니 대관령 아래 산골짜기의 가난한 집안일 수 있고, 어느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보니 커다란 바위틈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태어나는 생명은 환경의 선택권이 없다. 그러나 그런 바위틈에서도 비바람을 이겨내고 아름드리 소나무가 자란다. 선생님은 그 말을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지금도 내가 태어난 시골 마을 제방에 가면 아름드리 포플러 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아주 오래전 우리가 초등학생 시절 식목일 행사로 심은 나무였다. 그걸 심은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또 일하던 현직에서 물러나 퇴직했으니 그 나무의 나이도 예순 살이 되었을 것이다. 애초 그 제방은 냇물 옆의 작은 논둑이었다. 여름마다 개울이 넘쳐 어느 해인가 그곳에 제방을 쌓았다.
예전엔 마을마다 제방을 쌓을 때, 또 새롭게 길을 만들 때 품삯 대신 미국에서 구호양곡으로 보내온 밀가루를 주었다. 밀가루 포대에 태극기가 그려진 팔뚝과 별이 쉰 개나 된다는 성조기가 그려진 팔뚝이 악수하는 그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이 양곡은 미국시민이 우방국 국민들에게 무상으로 원조하는 것으로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걸 그냥 나눠준 것이 아니라 마을마다 길을 넓히고 제방을 쌓고 민둥산에 나무를 심는 품삯으로 주었다.
그 밀가루를 바탕으로 어느 해 봄부터 가을까지 어른들이 제방을 쌓고 아이들이 거기에 나무를 심었다. 얼핏 생각하기엔 물가에 서 있는 나무들일수록 영양분을 빨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없어 꾀를 부려 산에 있는 나무보다 뿌리를 얕게 뻗고 말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땅이 물렁한 물가에 서 있기 때문에 오히려 산에 있는 나무들보다 더 깊고 든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자기 몸을 지탱한다. 비바람에 늘 맥없이 뿌리째 뽑혀 나오는 건 산도 물가도 아닌 길가에 심은 가로수들이다.
그때 그 나무를 심은 우리는 이 나무들이 얼마나 크게 자랄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일찍 고향을 떠났던 사람도, 또 자주 고향에 들르는 사람도 매년 명절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하늘 높이 자란 나무를 보고 놀랐다. 자신들이 얼마나 오래도록 고향을 떠나 있었던가를, 그리고 그 시절로부터 또 얼마나 멀리 시간이 흘렀는가를.
그것이 어린아이들이 물가에 심은 손가락 같은 나무들이 어른이 된 그의 몸보다 몇 배 더 굵어지는 동안의 시간이다. 그 안에 세상도 참 많이 변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물가에 선 나무일수록 뿌리를 깊게 내리고,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