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기능에 감성 곱해 새 가치창출
단순 기계서 성취감으로 시장 키워

이제 시간을 알기 위해 손목시계가 꼭 필요한 사람은 거의 없다. 스마트폰은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고 알람과 일정까지 관리한다. 그렇다면 손목시계는 사라져야 정상이다. 그런데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백화점에는 수천만원, 수억원짜리 명품시계가 진열돼 있고 인기 제품은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렵다.
시장 규모를 보면 더욱 흥미롭다. 세계 고급시계 산업을 대표하는 스위스는 2025년 약 1460만 개의 손목시계를 수출했고 수출액은 244억 스위스프랑에 달했다. 전년보다 수출 수량은 4.8%, 금액은 1.7% 감소했지만 여전히 거대한 시장이다.
중요한 것은 시장의 변화다. 시계 판매량은 장기적으로 감소했지만 고가 제품의 비중은 커졌다. 시계산업이 ‘많이 파는 산업’에서 ‘가치를 파는 산업’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시계의 기능은 스마트폰에 빼앗겼지만 의미는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손목을 보며 “지금 몇 시인가?”를 확인했다면 이제는 손목시계로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표현한다. 디자인과 브랜드를 좋아하고, 성공을 기념해 시계를 산다. 아버지의 시계를 아들이 물려받으면 가족의 역사가 된다.
시계는 이제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취향이고 추억이며, 성취이고 정체성이다. 2025년 딜로이트가 주요 시장 소비자 6500명을 조사한 결과, 향후 12개월 안에 전통시계를 구매할 의향은 54%, 스마트워치는 53%였다. Z세대의 40%는 중고시계 구매 의향을 밝혔다. 베이비붐 세대의 20%보다 두 배나 높았다. 디지털 세대가 오래된 시계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시계산업은 이미 비슷한 위기를 겪었다. 1970~1980년대 값싸고 정확한 일본 쿼츠시계가 등장하자 스위스 기계식 시계산업은 벼랑 끝으로 몰렸다. 그러나 스위스는 경쟁의 축을 바꿨다. 정확성을 파는 대신 역사와 전통, 장인정신과 희소성을 팔았다. 정교한 기계식 무브먼트는 예술이 되고 오래된 브랜드의 역사는 자산이 됐다. 기능에 의미를 곱한 것이다.
이것이 X경영의 중요한 원리다. 기능에 디자인과 스토리, 경험과 감성, 정체성을 곱하면 새로운 가치가 탄생한다.
커피도 마찬가지다. 카페인 섭취가 목적이라면 값싼 커피 한 잔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몇 배의 돈을 내고 좋은 카페를 찾아간다. 커피뿐 아니라 공간과 휴식, 만남과 경험을 사는 것이다. 여기에 기술혁명 시대의 생존법칙이 있다. 기술혁명은 오래된 제품을 무조건 죽이는 것이 아니라 기능에만 머물러 있는 제품을 도태시킨다.
오늘 최고의 기능도 내일이면 평범해진다. 따라서 기업은 “우리 제품에는 어떤 기능이 있는가?”를 넘어 “우리 제품에 어떤 의미를 곱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AI혁명 시대엔 이 질문이 인간에게도 다가온다. AI가 계산하고 번역하고 글 쓰고 분석한다. 인간의 전문능력이라고 여겼던 기능까지 빠르게 대신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까. 지식에 통찰을 곱하고, 기술에 감성을 곱하고, 전문성에 협업을 곱하고, 능력에 신뢰와 책임을 곱해야 한다. AI가 기능을 대신할수록 인간은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손목시계는 우리에게 시간보다 중요한 교훈을 알려준다. 기능을 빼앗겼다고 시장까지 빼앗긴 것은 아니다. 새로운 의미를 곱하면 새로운 시장이 열린다. 기능의 종말은 산업의 종말이 아니다. 새로운 가치 창조의 출발점이다.
X경영 시대의 생존전략은 명확하다. “기능이 끝나면 새로운 의미를 곱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