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제품에 가격이 인쇄되어 유통되는 상품이 있다. 바로 책이다. 출판문화산업진흥법에 따라 2003년 도입되고 2014년 전면 개정된 도서정가제 때문이다.
출판사가 가격을 정해 표지에 표시하면 서점은 판매가격을 임의로 바꿀 수 없다. 가격할인은 최대 10%까지, 마일리지나 사은품 등 경제상 이익을 더한 전체 할인폭도 15%를 넘지 못한다. 도서정가제는 유사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강력한 경쟁제한 제도다.
올해 말이면 도서정가제의 규제재검토 시기가 다시 돌아온다. 법률에 따라 정부는 3년마다 제도의 타당성을 살펴 폐지·완화·유지 등의 조치를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재검토 시점마다 사회적 갈등만 증폭될 뿐 합리적인 진전은 더디다. 소비자의 선택권을 침해하는 규제를 당장 폐지하라는 목소리와, 직·간접 할인을 완전히 없애는 완전도서정가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요구가 매번 팽팽히 맞선다.
이런 대립이 되풀이되는 것은 지난 10여 년간 도서정가제의 성과를 둘러싼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서정가제가 무분별한 할인경쟁을 막아 출판 생태계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통계수치만 놓고 볼 때 제도가 성공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전국의 동네서점은 여전히 줄폐업의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성인독서율 역시 해마다 역대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도서정가제 덕분에 좋은 책들이 그나마 계속 발간될 수 있었다는 점은 인정되어야 한다. 책은 일반 상품과 달리 구매 직후 즉각적인 가치를 체감하기 어려운 경험재다. 한 권을 온전히 읽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독자의 입소문과 전문가의 비평, 학술적 인용 등이 차곡차곡 쌓여야 비로소 그 책의 질적 가치가 입증된다. 출간 직후부터 전면적인 가격할인 경쟁을 허용한다면, 공을 들여 만든 책은 오히려 매대에서 밀려나기 쉽다.
문제는 신간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보호막이 재고로 쌓여 있는 구간도서의 자유로운 시장경쟁까지 옭아매고 있다는 점이다. 현행법은 발행일로부터 12개월이 지나면 출판사가 정가를 낮출 수 있는 재정가 제도를 두고 있지만 실효성은 크지 않다. 전산망 수정뿐만 아니라 도서마다 가격 라벨을 일일이 덧붙여야 하는 등 비용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탓에 출판사들은 조기절판을 하거나 멀쩡한 책을 파쇄하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이번 재검토에서는 실효성을 잃은 재정가 제도를 과감히 손질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프랑스의 경우 신간 출간 후 24개월이 지나고 서점이 6개월 이상 보유한 재고서적에 대해선 유통 단계에서 자율적 할인 판매가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두고 있다. 재정가 제도만 합리화해도 동네서점은 재고 부담을 줄일 수 있고, 소비자는 동네서점을 찾아 자신에게 맞는 책을 한권 한권 살펴보고 구매할 수 있을 것이다. 도서정가제의 존폐를 둘러싼 소모적 논쟁에서 벗어나, 살릴 것은 살리고 풀 것은 푸는 정교한 제도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