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의약품 데이터 깨워야…AI 수급 예측, ‘품절 악순환’ 끊는다[약의 길을 바꾸자-下①]

입력 2026-08-2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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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의약품 도매상 전국 721곳…‘깜깜이 재고’문제 해결할 데이터 연계·관리 AI 필요

(그래픽=신미영 기자 win8226@)
(그래픽=신미영 기자 win8226@)

전국 약국과 병원에서 고질적으로 반복되는 의약품 품절 사태의 원인으로 ‘정보 단절’이 지목됐다. 제약사의 생산부터 도매상의 유통, 일선 약국과 병원의 소비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조망하는 투명한 공급망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를 위해 의약품 업계는 디지털 인프라와 AI로 체질 개선에 나서는 분위기다.

20일 의약품 업계에 따르면 AI를 활용해 수급 상황을 예측하는 이른바 ‘지능형 의약품 공급망’이 급부상하고 있다. 데이터를 통해 생산, 공급, 수요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만성적인 품절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다는 시도다.

현재 국내 의약품 유통 시장의 가장 큰 문제점은 유통 과정에 참여하는 이들이 모두 서로 다른 정보를 지니고 있는 이른바 ‘깜깜이 재고’ 현상이다. 의약품이 약국과 병원의 임상 현장에 도달하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는 만큼, 제약사가 약을 얼마나 생산했는지, 수많은 도매업체 창고에 물량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 실제 일선 약국에서 얼마나 팔려나가는지에 대한 정보가 파편화된 실정이다. 정부 차원에서 의약품 일련번호 제도를 도입해 유통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지만, 이는 주로 사후 보고와 규제 모니터링에 활용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환절기마다 어린이용 감기약과 해열제 등은 약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품귀 현상이 발생한다. 특히 코로나19와 독감이 동시에 유행했던 시기에는 감기약, 해열제, 진통·소염제 등의 품귀 현상이 전국 약국에서 반복됐다. 대한약사회가 2023년 4월 전국 약사들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선 응답자의 83.6%가 의약품 수급 불안으로 인해 조제하지 못하고 환자를 돌려보낸 경우가 있다고 답했다.

유통 과정을 꿰뚫는 시스템이 없어 의약품 수요에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제약사는 도매상에 의약품을 넘기고, 약국은 온라인이나 특정 도매상에 주문을 넣어 의약품을 배송받는다. 약국에서 지속해서 이용했던 온라인 페이지나 도매상에 특정 의약품이 품절 상태라면, 재고가 어느 도매상에 얼마만큼 남아있는지는 물론 재주문이 가능한 시점조차 파악할 방법이 없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발간한 2025년 식품의약품 통계연보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국내 의약품 도매상 업체 수는 서울에만 1104곳, 전국에 총 5036곳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 가운데 일정 규모와 조직을 갖춘 기업의 비율은 미지수다. 한국의약품유통협회에 따르면 회원사로 가입된 도매상은 서울 지역에만 232곳, 전국적으로는 721곳이 운영 중이다. 군소 업체가 난립한 유통 환경에서 특정 의약품에 대한 수요가 예상치 못하게 급증하거나, 일시적으로 공급량이 감소할 경우 혼란이 고스란히 시장에 타격을 주는 양상이다.

의약품 업계에서는 데이터를 연계·관리하는 것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공급량과 재고가 유통 단계에서 통합돼 실시간으로 조회된다면 약국과 병원에서 반복되는 품절 사태를 방지할 수 있어서다. 그뿐만 아니라 과거 공급 및 거래 내역을 데이터베이스 삼아 AI가 지역별, 품목별 처방 추이와 감염병 유행 패턴, 계절적 요인 등 변수를 분석하면 수요 예측까지 가능해진다. 수요 폭증이 예상되는 품목은 제약사가 선제적으로 생산량을 늘리고, 유통업체는 지역별로 약국과 인구수 등에 기반해 재고를 배치하는 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국내 주요 제약사와 유통사들은 앞다퉈 디지털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바코드와 일련번호를 활용해 재고의 위치를 파악하고, 유통 단계에서 사재기나 재고 유출 및 불법 판매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다.

제약사 가운데는 대웅제약이 유통망 관리 성과로 급부상 중이다. 현재 자사의 보툴리눔 톡신 ‘나보타’에 대해 온·오프라인을 포괄하는 정품 유통 관리망을 운영하고 있다. AI를 접목한 모니터링 시스템을 적용해 유통망을 통제하고, 올해 1월부터는 불법 유통 적발 시 해당 병·의원과 즉시 거래를 영구 중단하는 제도도 도입했다. 또한 대웅제약은 올해 3월 권역별로 기준을 충족한 도매업체를 거점으로 지정하는 이른바 ‘블록형 거점 도매’ 모델을 도입했다. 다단계 유통 구조를 단순화하고 AI 기반 수요 예측과 바코드 배송 추적 시스템(TMS)을 활용해 재고를 실시간 관리하는 것이 목표다.

유통사 중에서는 지오영이 디지털 및 AI 전환의 선두에 있다. 지오영은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 5조3509억원, 영업이익 1036억원을 기록해 중소 업체가 난립한 의약품 유통업계서 가장 규모가 큰 기업으로 꼽힌다. 지오영은 국내 의약품 유통업계 최초로 첨단 자동화 기술을 도입한 인천 소재 ‘스마트허브센터’를 2024년부터 가동해 왔다. 자체 개발한 물류센터 관리시스템(WMS)인 ‘지오넷플러스’로 입고·재고를 관리하고, 판매 계획에 따라 물류 프로세스를 운영한다. 병원 등 의료 현장의 의약품 수요 변화에 신속히 대응하고, 로봇을 활용해 정확성과 속도를 높인 것이 스마트허브센터의 특징이다.

의약품 유통 구조를 둘러싼 시장이 지속적으로 불어나는 만큼,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교통정리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2025년 완제의약품 유통정보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모든 유통단계에서의 의약품 유통금액은 108조원으로, 전년 대비 7조5000억원(7.4%) 증가했다. 특히 공급 주체 별로 의약품 제조사는 34조5000억원, 수입사는 13조6000억원에 불과했지만, 도매상 공급은 무려 59조9000억원으로 전체 시장의 55.5%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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