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킹·성범죄·아동학대·가정폭력 등 범죄유형별 시나리오

가상현실(VR) 기기를 쓰자 헤어진 연인의 팔을 붙잡아 끌고 가는 남성의 모습이 시야를 채웠다. 여성은 붙잡힌 팔을 빼내려 했지만 남성은 소리치며 놓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도 두 사람의 실랑이는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낮게 깔린 음악 사이로 여성은 남성의 분노를 피해 달아나는 이유를 털어놨다.
잠시 뒤 장면이 멈추고 화면이 어두워졌다. ‘감정은 행동의 정당성이 될 수 없다’는 문구가 떠올랐다. 이어 ‘당신의 행동을 상대방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라는 질문과 네 가지 선택지가 나타났다.
손가락으로 ‘무서웠을 것 같다’는 답변 하나를 가리켜 선택했다. 선택에 따라 공감하거나 왜곡된 생각을 바로잡는 설명이 이어졌다. 임상묵 서울남부교도소 심리치료사는 “수형자가 어떤 답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어지는 안내 내용도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4일 찾은 서울남부교도소 심리치료센터. 이곳은 스토킹·성범죄 수형자 가운데 가학성이 높은 이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교정이 이뤄지는 시설이다. 이날 기자는 실제 수형자에게 제공되는 VR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체험했다.
센터는 수형자가 저지른 범죄와 가장 유사한 시나리오를 골라 치료에 활용한다. 센터 관계자는 “현재 치료받는 스토킹 사범의 약 90%는 과거 연인이었던 피해자를 상대로 범죄를 저질러 대부분 헤어진 연인을 스토킹하는 시나리오로 치료받는다”고 했다.
VR 심리치료의 핵심은 자신의 가해 행위를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기객관화’다. 자극적인 묘사는 덜어내고, 범죄 상황을 제시한 뒤 당시 자신의 행동을 어떤 생각으로 정당화했는지, 그 인식이 왜 잘못됐는지를 질문과 답변을 통해 반복적으로 짚는 방식이다.
VR 심리치료는 △성폭력 6종 △스토킹 4종 △아동학대 4종 △가정폭력 4종 등 범죄유형별 특성을 반영한 시나리오가 마련돼 있다. 각 시나리오마다 5회차로 구성돼 한 회차당 약 15분이 소요된다. 통상 일주일에 한 회차씩 진행된다. 남부교도소에서는 매일 2~3명의 수형자가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임 치료사는 “스토킹 사범은 피해자에 대한 분노가 큰 경우가 많다”며 “상황을 위에서 조망하듯 바라보게 해 ‘상대방이 많이 힘들었겠구나’, ‘내 행동이 공포였구나’라고 인식하도록 한다”고 설명했다.

기기를 벗는다고 치료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기존 집단상담 등 과정에 VR을 결합하고, 치료사가 수형자가 느낀 감정과 생각을 다시 상담에서 끌어낸다. 임 치료사는 “잊고 있던 사건과 다시 마주하면서 감정이 격해질 수 있다”며 “기계로만 끝내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가 이후 감정을 충분히 다루고 탐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센터 관계자에 따르면 수형자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한 수형자는 기기를 쓰자마자 벗어 던지며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것이냐”고 강하게 거부했다. 치료 이후 “왜 잊었던 일을 다시 꺼내느냐”며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수형자도 있었다. 고령 수형자 중에는 어지럼증과 구토 증상을 호소하기도 했다.
시나리오 중에는 13세 미만 아동 대상 성범죄 내용도 있었다. 범죄 장면을 노골적으로 재현하지는 않았지만, 기자는 해당 콘텐츠가 오히려 수형자에게 또 다른 자극으로 작용할 우려를 물었다.
이에 이지원 법무부 심리치료과 교감은 “치료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그런 우려를 충분히 검토하는 과정이 있었다”며 “시범운영 결과와 전문가 의견을 종합했을 때 우려되는 부작용보다 치료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가 더 크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법무부는 6월까지 시범운영을 마친 뒤 지난달부터 전국 11개 교정기관에서 프로그램을 본격 운영하고 있다. 향후 운영 성과를 지속적으로 분석해 범죄유형별 콘텐츠를 보완·고도화할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