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이란 세력의 약화 또는 와해
헤즈볼라의 정치적 고립 노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레바논과 관계 개선에 나섰다. 이란 전쟁에서 독단적 행보를 이어온 이스라엘을 견제하는 한편, 레바논 반정부 무장세력인 헤즈볼라를 고립시키기 위한 외교 전략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21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조셉 아운 레바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 소셜미디어를 통해 "모든 미국 국민이 이 아름다운 땅을 편하게 방문할 수 있도록 모든 미국 항공사가 레바논으로 직항편을 운항할 수 있도록 행정부에 지시한다"고 밝혔다. 이어 "다른 국가들도 같은 조처를 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레바논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한 것도 2009년 이후 처음이다.
40년 넘게 닫혀 있던 레바논과의 직항 하늘길을 다시 연 셈이다. 겉으로는 항공 운항 재개 조치지만 그 이면에는 숨겨진 외교 전략이 숨겨진 것으로 분석된다. 가디언을 포함한 주요 외신은 “이번 조치가 레바논 정부의 권위를 강화하고 헤즈볼라의 영향력을 약화하려는 미국의 중동 전략과 맞닿아 있다”고 분석했다.
먼저 미국과 레바논 간 직항편은 1985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재임 때 중단됐다. 당시 그리스 아테네에서 출발해 이탈리아 로마로 향하던 TWA 여객기 납치 사건이 계기였다.
AFP통신 등에 따르면 1985년 6월 TWA 소속 보잉 727 여객기가 아테네를 떠나 로마로 향하던 중, 권총과 수류탄을 든 레바논 무장대원 2명에게 납치됐다. 항공기는 베이루트와 알제리 사이를 여러 차례 오갔고, 승객들은 국적과 종교에 따라 분리됐다.
납치범들의 핵심 요구는 이스라엘이 억류하고 있던 레바논 시아파 수감자 수백 명의 석방이었다. 인질 사태는 17일간 이어졌고, 마지막 미국인 인질들은 시리아와 레바논 시아파 지도자들의 중재로 풀려났다. 그러나 미 해군 소속 잠수요원 한 명은 당시 납치범들에게 희생됐다. 당시 납치 사건이 40여 년간 미국과 레바논의 직항 하늘길을 40년 넘게 막아놓은 계기가 됐다.
실제 운항이 재개되려면 베이루트 공항에 대한 미국 당국의 보안 심사와 인증 절차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이번 발표는 미국이 레바논을 더 이상 헤즈볼라의 근거지로만 보지 않고, 협력할 수 있는 국가로 다시 평가하기 시작했다는 상징성을 갖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운 대통령에게 “레바논을 돕겠다”고 약속하며 “그동안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나라가 존중받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아운 대통령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평화 구상을 그의 정치적 유산”이라고 치켜세웠다.
이번 회담의 핵심에는 레바논 남부의 통제권 문제가 놓여 있다. 레바논 정부는 이스라엘군이 점령한 남부 지역에서 철수하기를 원한다. 동시에 레바논 정규군이 해당 지역을 넘겨받기를 요청했다. AFP통신에 따르면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군이 단계적으로 철수하면 레바논군이 곧바로 진입하는 이른바 ‘시범 구역’ 방안도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미국 정부가 친이란 무장정파 헤즈볼라를 대신해 레바논 정부와 정규군을 유일한 합법 권력으로 인정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헤즈볼라는 레바논에서는 오랫동안 정규군과 별개로 무장을 앞세워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그러나 미국이 레바논군을 훈련하고 무장시키는 한편, 남부의 실질적 통제권까지 넘겨준다면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에 맞서는 유일한 저항 세력’이라는 명분을 잃게 된다.
가디언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움직임에는 동맹국 이스라엘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담긴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과 친이란 세력 약화라는 목표를 공유하고 있으나 전쟁 수행 방식과 종전 구상을 놓고 엇갈린 견해를 내보인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안보를 보장하되, 이들의 군사행동이 미국의 전략을 넘어서는 상황은 막으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스라엘군을 철수시키고 그 자리를 레바논 정규군이 채우게 하는 방식은 이스라엘의 안보 우려를 줄이는 동시에 레바논의 주권도 세우는 절충안으로 풀이된다. 군사적으로 약해진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의 계속된 점령을 명분으로 세력을 회복하는 길도 차단할 수 있다.
결국 이번 레바논 직항 재개는 이러한 ‘압박과 보상’ 외교의 전형이라고 AFP통신은 분석했다.
이란과 헤즈볼라에는 공습과 제재, 무장해제를 요구하면서도 레바논 정부에는 직항편과 경제협력, 정규군 지원 가능성을 제시한 것. 무장을 내려놓고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참여하면 실질적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중동 각국에 보내는 셈이다.
레바논 입장에서도 미국과 이번 정상회담은 국가의 정통성을 회복할 기회다.
경제위기와 정치적 혼란을 겪어온 레바논 정부는 헤즈볼라보다 약한 존재로 비쳤으나 미국이 아운 대통령 정부를 협상 상대로 인정하고 항공·안보·경제 지원을 확대하면 국가기관의 권위가 높아질 수 있다. 레바논군이 남부를 실질적으로 통제할수록 헤즈볼라가 독자적인 무장조직을 유지할 명분은 좁아진다는 게 서방 주요 언론의 분석이다.
예루살렘포스트는 미 당국자 발언을 인용해 “현장에서 이뤄진 실질적인 진전이며 레바논 정부가 헤즈볼라의 영향권이던 지역에서 국가권력을 회복할 중요한 기회”라고 강조했다.
영국 가디언은 “미국이 헤즈볼라가 아닌 레바논 정부를 공식 협상 주체로 세우면서 친이란 세력의 와해를 노린 것”이라고 보도했다.
다만 일부 우려의 시각도 존재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직항 재개는 단순히 상징적인 선물에 가깝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철수를 압박할 구체적인 약속은 내놓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