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경험까지 디지털 자산으로 연결
고객과 함께 제조 운영체계 혁신

생성형 AI 열풍이 산업계 전반으로 확산하면서 제조업도 AI 도입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넘어 조선, 철강, 중공업까지 AI를 활용한 생산성 혁신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산업 현장에서는 “AI를 도입했는데 기대만큼 효과가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적지 않다. 데이터는 넘쳐나지만 AI가 제대로 학습하고 이해할 수 있는 형태의 데이터는 생각보다 많지 않기 때문이다.
비스텔리젼스는 이 지점을 공략했다. AI 모델을 만드는 것보다 먼저 제조 현장의 데이터를 어떻게 수집하고, 정제하며, AI가 이해할 수 있는 맥락(Context)으로 연결할 것인지에 집중한다. 단순히 솔루션을 공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객사와 함께 데이터를 만들고 AI를 학습시키며 현장에 적용하는 전 과정을 함께한다.
이한주 비스텔리젼스 대표는 13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많은 기업이 AI를 도입하겠다고 하지만 실제 현장에 가보면 AI가 학습할 만한 데이터가 준비되지 않은 경우가 상당수”라며 “좋은 AI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AI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데이터를 만드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 대표가 이러한 철학을 갖게 된 배경에는 30여 년간 제조 현장에서 쌓아온 경험이 있다.
그는 1990년 삼성전자 반도체에서 자동화 엔지니어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국내 반도체 공장에 제조실행시스템(MES)이 막 도입되던 시기였다. 이후 미국 보스턴에서 글로벌 자동화 솔루션 기업들을 경험한 뒤 브룩스오토메이션으로 자리를 옮겨 반도체 자동화 시스템을 개발했다. 삼성전자 미국 오스틴 공장의 팹 구축을 총괄했고, 이후 SK하이닉스로 자리를 옮겨 전사 애플리케이션과 제조 솔루션을 총괄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삼성과 SK하이닉스, 글로벌 자동화 기업을 거치며 그가 내린 결론은 의외로 단순했다.
자동화의 핵심은 장비가 아니라 데이터를 이해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초기 자동화는 사람이 하던 일을 시스템으로 옮기는 수준이었다”면서 “지금은 AI가 의사결정까지 지원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지만, 그 사이에는 반드시 데이터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제조업에서 AI가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데이터 레디(Data Ready)’ 단계가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데이터 레디란 단순히 데이터를 많이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AI가 데이터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학습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과정이라는 설명이다.
이 대표는 “데이터가 많다고 좋은 데이터는 아니다”라면서 “중요한 것은 데이터의 양이 아니라 어떤 맥락(Context)을 담고 있느냐”라고 말했다.
이러한 철학은 비스텔리젼스의 사업 방식에도 그대로 녹아 있다.
많은 AI 기업들이 솔루션을 구축해 공급하는 방식이라면, 비스텔리젼스는 고객사와 함께 문제를 정의하는 단계부터 시작한다. 어떤 데이터를 모아야 하는지, 기존 센서만으로 충분한지, 추가 데이터는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데이터를 정제한 뒤 AI 모델을 학습시켜 현장에 적용한다. 이후 실제 운영 결과를 다시 분석하고 AI를 지속적으로 고도화하는 과정까지 공동으로 수행한다.
그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좋은 데이터로 만들고, 그 안에서 인사이트를 찾아내고, 최종적으로 제조 현장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단계까지 함께 가야 한다”며 “우리는 고객에게 솔루션만 제공하는 회사가 아니라 제조업의 운영 방식을 함께 만들어가는 파트너가 되고자 한다. 이를 우리는 SaaS (Service as a Solution)이라 정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현재 제조업 AI가 넘어야 할 가장 큰 과제로 ‘데이터의 맥락(Context)’을 꼽았다. 제조 현장에서는 이미 방대한 양의 센서 데이터가 쌓이고 있지만, 이를 연결해 의미 있는 정보와 지식으로 활용하는 기업은 아직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제조 데이터를 ‘점과 선, 면, 그리고 입체’에 비유했다.
“온도, 압력, 전류처럼 센서 하나가 보내는 값은 하나의 ‘점’입니다. 이 점들이 시간 순으로 연결되면 변화의 흐름을 보여주는 ‘선’이 됩니다. 여러 센서와 공정이 연결되면 ‘면’이 되고, 여기에 제품, 설비, 레시피, 작업 조건, 외부 환경까지 함께 연결될 때 비로소 제조 현장의 입체적인 맥락(Context)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제조 기업들이 통계적 공정관리(SPC)나 설비 이상감지(FDC)를 활용해 개별 설비의 상태를 관리해 왔다면, 앞으로는 공정 전체를 연결해 원인과 결과를 함께 이해하는 단계로 진화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 대표는 “압력이 올라갔다는 사실 자체는 현상을 보여줄 뿐”이라며 “그 순간 어떤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는지, 어떤 레시피를 적용했는지, 어떤 가스가 투입됐는지, 장비 상태와 주변 환경은 어땠는지까지 연결해야 비로소 품질에 어떤 영향을 줄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접근법은 비스텔리젼스가 AI를 바라보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생성형 AI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산업계에서는 AI 도입 자체가 경쟁력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이 대표는 AI보다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데이터 품질과 데이터의 맥락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많은 기업들이 AI라는 목표부터 세우는데 현장에 가보면 정작 AI가 학습할 데이터는 준비돼 있지 않은 경우가 정말 많다”면서 “데이터를 모으는 것과 AI가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를 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이러한 이유로 비스텔리젼스의 역할도 단순한 데이터 분석을 넘어선다고 설명했다. 센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시각화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 간의 관계와 맥락을 이해하고 원인을 분석하며, 나아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까지 제안하는 것이 회사가 지향하는 ‘매뉴팩처링 인텔리전스(Manufacturing Intelligence)’라는 것이다.
그는 “센서 데이터를 모니터링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데이터가 어떤 상황에서 발생했고, 왜 그런 결과가 나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까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며 “우리는 데이터를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로부터 인텔리전스를 만들어내는 일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비스텔리젼스는 반도체를 비롯해 조선, 철강, 중공업 등 다양한 제조업을 대상으로 AI 기반 제조 솔루션을 공급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을 보여주는 사례가 국내 한 대형 제조 현장과의 프로젝트다. 비스텔리젼스는 핵심 기관 설비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분석하는 AI 솔루션을 개발하고 있다. 진동·압력 같은 센서 데이터를 모니터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설비의 실제 운영 조건과 외부 환경 요인까지 결합해 이상 징후와 최적 유지보수 시점을 예측한다. 개별 센서값이 아니라 '맥락'을 함께 읽는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 대표는 AI의 역할도 단순한 자동화를 넘어 사람의 업무를 고도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AI가 엔지니어를 대체한다기보다 반복적인 업무를 줄여주고, 엔지니어가 더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현재 AI의 역할”이라면서 “사람의 경험을 디지털 자산으로 축적하고 AI가 이를 확장하는 것이 앞으로의 제조업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제조업 AI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술보다 현장을 이해하는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도 했다.
특히 숙련 기술자의 은퇴가 이어지는 제조업 현실을 AI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로 꼽았다.
그는 “앞으로 제조업의 가장 큰 과제는 사람”이라며 “경험 많은 엔지니어들은 은퇴하고 있고 젊은 인력은 제조업을 기피하고 있다. 결국 이들의 경험을 데이터와 AI를 통해 디지털 자산으로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제조 AI의 미래를 단순한 생산성 향상이 아닌 제조업 운영 방식의 변화로 바라봤다. 산업혁명마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지만 산업을 바꾼 것은 결국 기술 자체보다 운영 방식이었다는 설명이다.
현재 제조업 AI가 ‘예측(Prediction)’ 중심이라면 앞으로는 ‘추론(Reasoning)’ 중심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놨다.
그는 “예측은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지를 알려주는 것”이라며 “하지만 추론은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설명하고, 어떤 조치를 해야 하는지까지 제안한다. 생성형 AI의 발전으로 제조 AI도 결국 추론 중심으로 진화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대표는 국내 제조업이 AI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초 체력을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최근 제조업 전반에서 AI 도입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정작 데이터 수집 체계와 센서 인프라 구축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기업이 AI부터 이야기하지만 AI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어떤 데이터를 수집해야 하는지, 센서를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부터 고민해야 한다”면서 “그 과정을 건너뛰면 결국 AI도 기대했던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그는 제조업 AI 경쟁의 승패는 화려한 알고리즘보다 현장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느냐에서 갈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