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 부족이 후발주자 키워…과거식 치킨게임도 한계"
"국가가 공급할 건 재정 아닌 시간…병목 제거가 역할"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인공지능(AI) 시대의 국가 경쟁력은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을 얼마나 빠르게 대규모 생산능력으로 바꾸느냐에서 갈린다며 반도체 팹(Fab·생산공장) 증설 속도를 거듭 강조했다. 국내 메모리 기업의 증설이 늦어지면 중국 등 후발주자에 시장을 내줄 수 있는 만큼, 국가가 전력·용수·인허가 병목을 걷어내 기업에 '시간'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실장은 11일 본인의 페이스북에 '생산능력이 새로운 국력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AI 혁명은 생산혁명"이라며 "결국 시장을 선점하는 국가는 가장 뛰어난 기술을 보유한 국가가 아니라, 그 기술을 가장 빠르게 대규모 생산능력으로 전환하는 국가"라고 썼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투자를 놓고 야권이 '관치 경제'라고 비판하는 가운데, 김 실장이 지난달 말부터 이어온 글의 연장선이다.
김 실장은 AI 혁명을 산업혁명·디지털 혁명에 이은 또 하나의 '생산혁명'으로 규정했다. 여기서 생산능력은 공장을 많이 짓는 게 아니라, 필요한 시점에 첨단 반도체를 충분한 물량으로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종합 역량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첨단 팹과 공정기술, 높은 수율(양품 비율), 첨단 패키징, 소재·부품·장비 공급망, 전력·용수까지 산업 생태계 전체가 함께 만들어내는 힘이라는 것이다.
그는 세계 주요국이 이미 '생산능력 전쟁'에 들어섰다고 진단했다. 미국은 재정·세제 지원으로 첨단 제조시설을 유치하고, 중국은 국가 지원과 거대 내수시장을, 대만은 세계 최고 수준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능력을 앞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김 실장은 "20세기 국력을 결정한 것이 석유와 해상교통로였다면, AI 시대에는 첨단 반도체 생산능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AI로 메모리 수요가 늘어나는 국면이 역설적으로 후발주자를 키울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공급이 부족하면 고객이 '가장 좋은 제품'보다 '제때 받을 수 있는 제품'을 택하게 되고, 후발주자는 이렇게 확보한 매출과 생산 경험으로 수율을 높여 다시 기술을 추격한다는 지적이다. 김 실장은 중국 메모리 기업을 사례로 들며 "오늘의 공급 부족이 내일의 경쟁자를 키운다"고 지적했다. 과거처럼 물량 공세로 가격을 낮춰 후발주자를 밀어내는 '치킨게임'도 수요가 구조적으로 늘어나는 AI 시대엔 효과가 제한된다고 봤다.
팹 증설에 대해선 성장 투자를 넘어 기술격차를 지키는 방어로 규정했다. 시장이 커지는 속도만큼 생산능력을 늘리지 못하면 절대 생산량이 늘어도 점유율은 떨어진다는 논리다. 김 실장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평택 팹 증설, 800조원 규모 호남권 제2 클러스터 투자를 "초대형 생산기반 투자이자 국가적 프로젝트"로 규정하며 "국가가 지켜야 하는 것은 특정 기업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첨단 반도체 생산기반과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정부는 지난달 29일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서남권에 800조원을 투입해 메모리 팹 4기를 짓고 5년 내 D램 생산능력을 2배로 늘리는 계획을 발표했다.
국가의 역할에 대해선 "국가가 가장 우선적으로 공급해야 하는 것은 시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기업은 자본을 투자할 수 있지만 시간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며 "그 시간은 규제 완화나 제도 개선을 선언한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전력과 용수, 송전망과 인허가라는 현실의 병목을 실제로 걷어낼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이어 "시간은 비용으로 만회할 수 있어도, 잃어버린 시장은 쉽게 되돌릴 수 없다"고 덧붙였다.
김 실장은 "기술은 발명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생산으로 완성된다"며 "AI 시대의 국력은 기술에서 시작하지만 생산능력으로 완성된다. 생산능력이 새로운 국력"이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