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 반도체, 데이터센터 등 첨단 산업의 성장과 탄소중립 정책 확산으로 전력의 역할이 ‘생산량’에서 ‘안정적 전달 능력’으로 변화하고 있다. 고품질 전력 공급이 필수인 데이터센터 등 첨단 산업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전력망은 이제 단순한 인프라를 넘어 산업 성장의 핵심 기반으로 재정의돼야 한다. 이에 따라 고전압직류송전(HVDC) 기반의 에너지 고속도로가 전력 이동능력을 확보할 현실적 해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삼일PwC는 이같은 내용을 담은 ‘에너지 고속도로와 전력망 대전환’ 보고서를 발간했다고 23일 밝혔다. 보고서는 한국 전력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를 진단하고, 전력망 대전환을 위한 한국형 산업 전략을 분석했다.
보고서는 국내 전력 시스템의 핵심 문제가 전력을 필요로 하는 지역과 생산되는 지역이 구조적으로 분리돼 있다는 데 있다고 진단했다. 현재 국내 재생에너지와 발전설비는 해안과 지방에 집중된 반면, 전력 수요는 수도권과 첨단 산업단지에 몰리면서 수급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 이로 인해 송전망 확충이 수요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전력 병목이 발생하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전력을 생산하고도 외부로 보내지 못해 출력이 제한되는 가운데 수도권에서는 필요한 전력이 제때 공급되지 못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보고서는 이러한 전력망 문제가 기술 부족이 아닌 실행 구조의 제약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했다. 주요 송전망 사업이 인허가 지연과 주민수용성 문제로 수년씩 늦어지면서 전력망 계획과 실제 공급 사이의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이와 같은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해법으로 HVDC를 제시했다. HVDC는 기존 교류(AC) 방식보다 장거리 송전 효율이 높고 전력 흐름을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으며, 해저와 지중 송전에 적합한 구조를 가진다. 특히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력 수요 집중이 동시에 진행되는 현재 환경에서는 장거리·대용량 전력 전달이 필수적인 만큼 HVDC의 필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이와 함께 정부가 추진 중인 ‘에너지 고속도로’는 전력망 전환의 핵심 축으로 제시됐다. ‘에너지 고속도로’는 단순한 송전선 확충이 아니라 발전지와 수요지를 연결해 국가 전력망 구조를 재편하는 전략적 인프라 프로젝트다. 정부는 서해안을 시작으로 남해와 동해를 잇는 U자형 전국 전력망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재생에너지 생산지와 첨단 산업 수요지를 연결할 계획이다.
이어 보고서는 전력망 대전환의 핵심이 속도가 아닌 실행의 우선순위와 구조 설계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의 병목을 해소하는 데서 출발해 HVDC 실증을 통해 기술과 운영 역량을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전국 단위 전력망으로 확장하는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같은 물리적 인프라 구축에 그치지 않고, 지역별 수급 상황을 반영한 전력시장 개편과 산업 구조 전환이 함께 추진돼야 전력망 투자가 실질적인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제언했다.
한정탁 삼일PwC 에너지 트랜지션 리더(파트너)는 “전력은 더 이상 산업의 결과가 아니라 산업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 조건”이라며 “앞으로는 공장이 아니라 전력망이 산업 입지를 결정하는 시대가 본격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력망을 선제적으로 확보하는 국가가 AI·반도체 중심의 미래 산업 경쟁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