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과 제언] AI와의 대화를 통한 ‘관계 학습’

입력 2026-04-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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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공지능(AI)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공부는 물론 고민 상담, 외로울 때 대화까지 AI는 항상 응답하고 지치지 않으며 거절하지 않는다. 단순한 일상 주제를 넘어, 이제 AI에게 성적 대화를 반복적으로 요구하는 사례도 점점 늘고 있다. AI는 사람이 아니고 감정도 없으며 상처받지도 않는다. 이런 대화는 우리의 정서에 어떤 영향을 주는 걸까. 이는 단순한 도덕 논쟁이 아니다. 인간이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학습하는가에 관한 문제다.

심리학 연구는 오래전부터 한 가지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인간은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말투와 반응이 인간과 유사하면 그 대상을 인격체처럼 대한다는 점이다. 이 현상은 ‘미디어 방정식 이론’으로 알려져 있으며, 1990년대 클리퍼드 나스(Clifford Nass)와 바이런 리스브(Byron Reeves)의 실험을 통해 체계적으로 입증되었다. 참가자들은 컴퓨터를 단순한 기계라고 인식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행동과 감정 반응은 사람을 대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컴퓨터가 예의를 갖추거나 감정을 표현할 때, 사람들은 사회적 규범을 그대로 적용했다.

이 경향은 AI 대화 환경에서 훨씬 더 강해진다. 대화는 자연스럽고, 공감하는 말까지 더해진다. 그 결과 뇌는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상대’에 가까운 존재로 처리하기 쉽다. AI와의 대화는 점차 감정적이고 사적인 영역으로 이동하고, 일부 사용자에게는 친밀한 관계처럼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커진다. 이 변화는 실제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2024년 이후 발표된 여러 연구들은 AI 동반자 서비스 이용자들의 리뷰와 사용 경험을 분석한 결과, 상당수의 사용자가 AI와의 성적 대화나 성적 역할 등의 상호작용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음을 보고했다.

성욕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성적 욕구는 인간에게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감정이다. 핵심은 그 욕구가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고, 어떤 경험을 통해 반복적으로 학습되느냐다.AI에게 성적인 말을 할 경우, 대부분 즉각적인 반응이 온다. 거절당하지 않고, 상대의 불편함을 고려할 필요도 없으며,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대화는 이어진다. 시작과 종료 역시 전적으로 사용자 통제 아래 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사람은 특정한 관계 규칙을 학습하게 된다. 성적인 말이나 요구를 할 때, 상대의 경계나 반응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관계 방식을 익히게 된다.

성범죄와 사회심리학 연구가 반복해서 지적해 온 핵심도 여기에 있다. 타인의 경계와 동의를 무시하도록 형성되는 인식과 학습 과정이 실제 인간 관계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런 경험을 통해 문제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비약은 아니다. 그러나 공감 능력이나 충동 조절에 취약한 사람에게 이러한 학습 경험은 현실에서의 소통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학계는 반복적으로 지적해 왔다.

최근 윤리 기준을 강화한 AI 시스템들은 성적인 요청에 즉각 반응하기보다, 명확한 경계를 제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성적인 대화는 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성적 관계에는 동의와 중단 가능성이 필요하다는 원칙을 설명하며, 지금 그런 말을 하게 된 감정 상태를 되묻는다. 이는 검열이 아닌, 관계의 기본 규칙을 보여주는 반응이다. AI가 대신 경계를 제시함으로써, 사용자가 놓치기 쉬운 기준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AI와의 소통은 단순한 편의 기능을 넘어, 사람답게 관계 맺는 방식을 연습하는 환경이 될 수 있다. 존중과 경계, 동의와 거절이라는 개념을 AI와의 대화 속에서 반복해서 마주한다면, 우리는 타인을 하나의 주체로 인식하는 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 AI와의 대화는 삭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반복된 태도는 습관으로 남는다. 이는, 결국 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유진 | CASA 융합심리연구소 소장 | 한국아동미술치료학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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