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공시 제도의 모습과 일정을 담은 로드맵이 어떤 모습으로 확정될지 시장의 관심이 크다. 정부는 지난 3월 중 수렴한 각계 의견을 반영하여 이달 말 로드맵의 최종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수렴된 의견 중에는 현재의 계획이 수년 전 발표했던 당초 계획에 비하여 한참 축소되고 후퇴되었다는 비판이 많은 듯하다. 국제적인 정합성을 문제 삼는 의견도 많고 공시 지연으로 인한 투자자 이탈에 대한 우려를 담은 의견도 많다. 속도를 내라는 압박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들 우려가 혹시라도 과장된 것은 아닌지 짚어 보고 신중을 기하는 것이야말로 정부의 역할임이 분명하다. 특히 ESG 공시 제도의 완성도와 신뢰성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고 조급한 도입이 가져올 혼란에 대한 걱정도 여전한 만큼 신중한 태도를 갖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해 보인다. 사실 국제적으로도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요구는 강하다. 지난해 미국은 연방 차원에서 ESG 공시 규제의 도입을 더이상 진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유럽연합(EU) 역시 옴니버스 패키지 입법을 통해 공시 제도 전반에 대한 재검토를 했고 공시의 시기와 범위를 대폭 조정한 바 있다.
지속가능성 공시에 관한 논의는 2020년 전후로 급물살를 타기 시작했고 2023년 두 종류의 공시기준이 확정되면서 현실로 다가왔다. 하지만 두 가지 공시기준에 따른 공시는 지속가능성 공시라는 동일한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만 목적도 성격도 매우 다른 별개의 공시이다. EU재무보고자문그룹(EFRAG)이 제정한 유럽지속가능성보고표준(ESRS)에 따른 공시는 기업 활동에 대한 각종 규제의 준수 여부를 외부에 알리는 규제형 공시인 반면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가 제정한 ISSB 기준에 따른 공시는 투자자와 주주의 관심사항인 사업 활동의 보고를 목적으로 하는 주주보고용 공시이다. 전자가 기업 활동의 제약요인인 규제와 관련된 컴플라이언스 활동을 보고하는 데 비하여 후자는 기업의 본업인 사업 활동을 보고한다는 점에서 그 성격은 매우 다르다. 다만 ESRS 공시와 ISSB 공시가 모두 비재무성 공시이고 둘 모두 기업의 내부가 아닌 외부 환경과 관련된 사안들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어 두 공시의 차이를 분별하기는 쉽지 않다.
규제형 공시인 ESRS 공시는 기업이 규제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으며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공개하는 것이 목적이다. 물론 공시의 원천이 되는 규제가 국가나 규제 기관이 정한 법률규제나 행정규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제도화되지 않은 시장 내의 자발적 규율이나 규칙, 관행, 도덕적인 가치 등 비법률적이고 비행정적인 규제까지 포함된다. 온실가스 감축, 금지된 화학물질의 사용 제한, 오염물질 배출 금지 등이 전자라면 인종 다양성이나 정보 보안 등은 후자에 속한다.
EU와 EU에 속한 국가들은 입법을 통해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들로 하여금 ESRS 공시를 강제하고 있으며 이미 2025년 수백 개의 기업들이 공시를 시작했다. ESRS 공시 의무는 EU에 속한 국가의 기업에 국한하여 부과된다. 물론 역외 기업에 대해서도 확대 적용되어 2029년부터는 국내 기업 중에서도 의무적으로 공시를 해야 하는 기업들이 일부 있지만 국내 기업 모두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대부분 국내기업들에 ESRS에 따른 규제형 공시여부는 선택사항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국내기업이 규제형 공시인 ESRS 공시를 하지 않았을 때 받을수 있는 불이익이 무엇인가이다. 유럽의 공급망으로부터 배제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한 불이익이다. 하지만 공시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해당 기업의 기업가치가 훼손된다는 사실은 동의하기 어렵다. 시장의 투자자들이 해당 기업에 대한 투자를 외면한다는 주장도 다소 과장되어 있다.
한국을 비롯한 비유럽 국가들이 도입을 추진 중인 ISSB 공지는 ESRS 공시와는 다른 주주보고형 공시이다. 이 공시는 기업 활동의 결과를 보고한다는 점에서 재무공시와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다만 재무공시가 기업의 활동 결과를 사업 실적 보고의 방식으로 공개하는 데 비하여 지속가능성공시는 외부 여건의 변화에 대한 기업의 대응 활동이나 대비 활동을 비재무적으로 공개한다는 점에서 재무보고와 차이가 있다.
기업이 급변하는 외부 환경의 변화로부터 사업과 관련된 기회와 위험을 찾아내고 이를 활용하거나 극복해 나가는 활동은 기업의 미래가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변수이며 주주와 투자자들의 초미의 관심사이다. 따라서 개별 기업이 공시를 통해 그 활동 내용을 투자자들에게 알리는 것 역시 기업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기업가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쉽게 수긍할 수 있다. 따라서 ISSB 기준에 따른 공시가 보편화된 상황에서 이를 피하거나 게을리 한다면 그 기업에 대한 시장의 평판은 하락하고 투자자의 외면을 받게 될지 모른다.
다만 주목할 사실은 ISSB 공시 제도는 유럽이 아닌 비유럽 국가들에 의해 도입이 추진되고 있는 만큼 그 도입의 시기와 방식을 결정함에 있어 이들 국가의 입장과 계획을 세심히 살펴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은 이미 지속가능성 공시 제도의 도입을 중단한 바 있다. 미국을 제외한 여타 국가들도 대부분 제도의 도입은 결정하였으나 그 범위를 기후변화에 따른 공시에만 국한하고 있다. 모두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수 있다.
주주보고형 공시인 ISSB 공시의 도입은 시장의 신뢰를 얻기 위한 매우 중요한 결정이며 언젠가는 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결정이다. 하지만 이 제도의 도입에 대한 국제사회의 입장은 아직 흔들리고 있다. 우리의 결정이 신중해야 하는 이유이다. 유럽 국가들이 ISSB 공시와는 성격이 다른 ESRS 공시를 이미 도입하고 실행한다는 사실만으로 우리가 조급해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