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광장-설동훈의 사회읽기] ‘유예사회’의 굴레를 벗어야 한다

입력 2026-02-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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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 사회학과 교수

인구위기 외치며 정책 설계는 부재
반향없는 현금 지원에 여전히 의존
출산·양육 권리 누릴 구조 개혁해야

세계 최저 수준인 한국의 출산율이 최근 소폭 반등하며 의미 있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결혼과 출산 의향 역시 2년 연속 상승했다. 인구보건복지협회 조사에 따르면 미혼 남성의 61%, 여성의 48%가 결혼 의향이 있다고 응답했으며, 출산 의향 또한 기혼·미혼 집단 모두에서 증가했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결혼과 출산의 ‘의지’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문제는 의지가 아니라 그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조건의 부재다.

중요한 전환 국면이지만 정부의 중장기 인구정책은 오히려 공백 상태에 놓여 있다. 2026년부터 시행되어야 할 제5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은 해를 넘긴 지금까지도 발표되지 않았다. 인구 위기를 국가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정책의 기본 설계도는 부재한 모순적 상황이다.

이재명 정부는 인구 위기 대응 강화를 국정과제로 제시하며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인구전략위원회’로 확대 개편하고, 고용·주거·교육 등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천명했다. 방향 설정 자체는 타당하다. 그러나 최근 공개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뉴스레터’ 제81호 ‘2026년 인구정책, 이렇게 달라집니다!’를 보면, 정책 내용은 여전히 기존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역대 정부의 인구정책은 반복적으로 ‘현금 지원’이라는 관성에 의존해 왔다. 수당과 바우처는 늘었지만, 출산율은 이에 응답하지 않았고, 청년의 삶은 오히려 더 불안정해졌다. 이는 인구 문제를 인간의 삶이 아닌 관리해야 할 지표로 취급해 온 결과다. 출산과 돌봄은 여전히 개인과 가족의 책임으로 환원되고, 삶의 조건을 바꾸는 구조 개혁은 정책의 주변부에 머문다.

이 지점에서 ‘유예사회’라는 개념이 중요해진다. 유예사회란 독립, 결혼, 출산과 같은 생애주기의 핵심 전환이 반복적으로 미뤄지는 사회를 의미한다. 오늘날 한국의 청년들은 결혼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유예하고, 출산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류한다.

선진사회에서 개인은 삶의 의미와 존엄이 보장될 때 비로소 다음 세대를 고민한다. 출산은 비용 대비 보상의 계산 결과가 아니라, ‘이 사회에서 아이와 함께 살아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고용은 불안정하고, 주거는 투기의 대상이 되었으며, 돌봄은 가족에게 전가된 사회에서, 출산은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위험한 도전이 된다.

출산과 양육은 사적 선택을 넘어 사회적 시민권의 문제다. 안정적 일자리, 예측할 수 있는 주거, 돌봄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시민으로서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다. 그러나 기존 인구정책은 이 권리를 제도화하기보다는 단기적 지원으로 대체해 왔다. 그 결과 출산은 권리의 확장이 아니라 부담의 증가로 인식되었다.

최근 결혼과 출산 의향의 회복은 한국사회가 아직 ‘비출산 사회’로 고착되지 않았다는 중요한 신호다. 그러나 남녀 간 결혼 의향률 차이가 13%포인트에 달한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일·가정 양립’ 정책 구호는 반복되지만, 여성에게 경제활동 참여와 출산, 돌봄을 동시에 요구하면서도 그 부담을 분담하는 구조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 신호를 구조적 정책 전환으로 연결하지 못하면 출산율 반등은 일시적 현상에 그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수당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계약이다. 인구정책은 출산을 독려하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들이 미래를 신뢰할 수 있도록 삶의 조건을 재구성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저출산의 원인을 개인의 부담과 선택 문제로 환원하는 한, 동일한 정책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인구전략위원회 논의가 단순한 조직 개편에 그치면 혁신은 불가능하다. 유예사회를 넘어 시민의 삶을 복원하는 근본적 전환만이 저출산 반등을 구조적 흐름으로 정착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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