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너머] 필리버스터 파행이 던지는 질문

입력 2025-12-1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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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적 관련성을 갖는 부분까지 확대해서 생각하자."

2016년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당시 이석현 국회부의장이 의제 외 발언 논란에 대해 내린 판단이다. 당시 최민희 의원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낭독했고, 강기정 의원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마이크는 꺼지지 않았다.

12월 정기국회 마지막 날, 상황은 달랐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나경원 의원의 필리버스터를 중단시켰다. 나경원 의원은 가맹사업법 개정안에 대해 필리버스터에 나섰지만 발언 시작 13분 만에 마이크가 차단됐고, 이후 정회와 재개가 반복됐다. 야당은 여야가 합의한 민생법안 59개에까지 필리버스터를 신청했고, 여당은 필리버스터 제한법으로 맞섰다.

필리버스터를 둘러싼 파행이 민주주의의 위기인지, 민주주의를 지키는 보루인지를 두고 해석이 엇갈린다. 필리버스터는 다수당의 횡포를 견제하고 소수자의 의견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는 국정원의 권한 남용 가능성에 대한 국민적 우려를 환기시켰고 법안 수정을 이끌어냈다. 단순한 시간 끌기가 아니라 공론화를 통해 법안을 개선하는 기능을 했다는 평가다.

다만 이번 사태는 제도의 이중성을 드러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야가 합의한 민생법안에까지 필리버스터를 신청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택배노동자 과로사를 막기 위한 법안, 지역화폐 법안이 처리되지 못했다.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잘못된 법이면 몰라도 민생 법안들에 왜 필리버스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민생을 정치적 흥정의 카드로 삼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셈이다.

국회의장의 마이크 차단을 두고도 논란이 이어진다. 우원식 의장은 국회법 제102조(의제 외 발언 금지)와 제145조(회의 질서 유지)를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필리버스터의 본질 자체가 쟁점 법안을 막기 위해 다른 법안의 토론 시간을 활용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과도한 개입이란 지적도 있다. 지난해 7월 추미애 의원은 EBS법 개정안 필리버스터에서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을 풍자하는 노래를 불렀다. 마이크는 꺼지지 않았다.

민주당이 추진하는 필리버스터 제한법에 대한 우려도 크다. 재적의원 60명 이상이 재석하지 않으면 필리버스터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107석인 국민의힘은 장기간 필리버스터를 지속하기 어려워진다. 조국혁신당은 "소수 의견을 보호하고 숙의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제도적 장치"를 무력화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다.

한 정치학자는 기자에게 "법을 한 정당만이 만들면 그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시민은 그 법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치적 상대편이 절차적으로 동의해야만 법의 정당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여야가 작동하는 복수 정당 체제가 민주주의의 본질이란 설명이다. 거대 여당이 소수당의 저항 수단을 제한하는 것은 훗날 여야가 바뀌었을 때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간접적 관련성까지 확대해서 생각하자"는 이석현 부의장의 판단은 상대에 대한 관용이었다. 불편하더라도 상대의 발언권을 인정하고, 비효율적이더라도 소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태도 말이다. 여야 모두에게 그 관용이 사라진 지금, 국회가 잃어버린 것은 필리버스터의 품격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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