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기업에 집도 있고 차도 있고 다 있는데 가만 보니 내가 없네 골 때리네.’
골 때리는 김부장의 이야기가 최근 유통가에서 살벌한 현실이 되고 있다. 특히 과거엔 '롯무원(롯데 공무원)'으로 불릴 정도로 안정된 직장으로 여겨진 롯데그룹의 구조조정 칼날이 매섭다.
롯데그룹에 따르면 유통·식품 계열 4개 사가 희망퇴직을 단행했거나 현재 진행 중이다. 롯데칠성음료는 21일까지 근속 10년 이상 임직원을 대상으로, 롯데멤버스는 19일까지 근속 5년 이상의 45세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창사 이래 첫 희망퇴직을 받고 있다. 특히 롯데멤버스는 창립 10주년을 맞아 ‘데이터 기업’ 전환을 선언했는데, 인공지능(AI) 도입 확산이 인력 감축에 결정타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편의점 세븐일레븐 운영사 코리아세븐도 올해 2년 연속 희망퇴직을 받았다. 세븐일레븐은 지난해 980여 개의 점포 수를 줄인데 이어 작년 10월과 올해 10월 두 차례 연속 희망퇴직을 시행했다. 롯데웰푸드도 올해 4월 만 45세 이상, 근속 10년 이상 임직원 대상 희망퇴직을 단행했다.
이커머스 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대형마트도 인력 감축에 나섰다. 이마트는 2019년 6월 말 기준 2만5000여 명이던 직원 수를 작년 6월 말까지 2000명가량 줄였다. 롯데마트도 같은 기간 1만245명으로 3000명 가까이 감축했다. 2023년 11월 첫 희망퇴직을 시작한 11번가는 올해 들어 이미 3차례나 신청서를 받았다.
면세점업계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이후 업황이 쉽사리 살아나지 않으면서 지속해서 인력을 줄이고 있다. 롯데면세점과 신세계면세점, HDC신라는 각각 작년에 희망퇴직을 받았고, 현대면세점과 신라면세점은 올해 4월 희망퇴직에 돌입했다.
아예 신규 채용을 하지 않은 곳도 늘고 있다. 편의점 CU 운영사 BGF리테일은 업황 둔화로 인해 올 하반기 공채를 하지 않았다. 홈플러스도 3월 기업회생 절차로 인해 1월 예고했던 공채를 중단했다. 소비 침체 등으로 반등이 쉽지 않은 유통업계 전반에서 ‘사람을 줄이는 일’이 경영 전략의 새로운 변수가 아니라 상수(常數)가 된 것이다.
물론 이런 상수는 시대적 흐름과 기술 진보라는 점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온라인 소비의 급성장, AI 도입의 확산, 무인화 기술의 상용화 등은 유통업의 구조를 완전히 바꾸고 있다. 물리적인 점포가 줄어들고,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주도하는 사업 모델로 바뀌는 과정에서 조직 내 인력 구성도 변화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던 김부장에게 희망퇴직은 과연 희망일까. 솔직히 말해, 퇴직이란 부정어에 ‘희망’이란 긍정어가 붙는 것부터가 모순이다. 퇴직 이후의 삶을 보장할 대안 없는 구조조정은 사실상 ‘절망퇴직’에 가깝다. 실제로 주요 유통사에서 근무하던 김부장 같은 다수의 중간 관리자, 영업직, 판촉직은 퇴직 이후 뚜렷한 경로 없이 노동 시장에서 밀려난다. 기술 진보와 조직 개편은 필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을 가장 먼저 줄이는 선택만이 반복된다면 이는 산업의 쇄신이 아니라 고통의 전가에 불과하다.
오늘도 유통가에서 희망퇴직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이름 아래 조용히 회사를 떠나는 이들만 계속 늘어난다면, 유통산업의 지속가능 경쟁력을 담보하기 힘들다. 지금 김부장에게 필요한 것은 퇴직 위로금이 아니라, 매일 가족들의 응원을 받고 출근하는 ‘일터’임을 명심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