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반도체 산업이 미·중 관세전쟁 속에서 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다. 한때 설계·생산·소재·조립으로 세분화돼 ‘세계화의 상징’이던 글로벌 공급망은 지정학적 압력 속에 지역별로 쪼개지는 양상이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옴디아는 2029년 전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가 1조 달러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지만, 성장의 이면에는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 급증뿐 아니라 관세로 인한 구조적 변동이 자리하고 있다.
4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최근 AI 그래픽처리장치(GPU) 전 제품군 가격을 최대 15% 인상했다. 미국 정부의 신규 관세와 생산비용 증가가 직접적인 요인이다. 글로벌 파운드리 1위 TSMC도 첨단 웨이퍼 가격 10% 인상을 검토 중이다. 미국 애리조나 공장에서 4나노미터(㎚) 칩을 생산할 경우 대만 대비 약 30%의 추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AI 수요가 단기적으로 비용 상승을 상쇄하고 있지만, 전자제품 전반의 가격 인상은 불가피하다”고 진단했다.
옴디아는 올해 4월 발효된 관세가 반도체 공급망에 실질적인 충격을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반도체 탑재 비중이 높은 완성품의 출하량 전망치는 낮아졌지만 단가 상승으로 매출 비중은 오히려 증가했다. 마이슨 로블레스 브루스 옴디아 수석 애널리스트는 “관세가 시장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앤 고 옴디아 연구매니저는 “제조업 전반이 이제 단순한 생산기반이 아닌 전략자산으로 인식되고 있다”며 “관세정책은 리쇼어링(생산거점 회귀)을 유도하는 산업정책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글로벌 반도체 산업은 효율 중심의 ‘세계 통합 모델’에서 지정학적 이해를 기반으로 한 ‘지역별 생태계’로 전환 중이다. 미국은 TSMC의 1650억 달러 대미 투자와 반도체지원법(CHIPS Act)으로 자국 생산을 강화하고, 중국은 국유 자본 중심으로 반도체 자립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일본은 10조 엔 규모의 AI·반도체 투자 계획을 세웠고, 인도는 마이크론·폭스콘 등과 협력해 생산기지를 확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엔비디아로부터 최신 GPU 26만 장을 공급받기로 하며 글로벌 AI 인프라 경쟁에서 ‘게임 체인저’로 부상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최첨단 반도체는 미국 외 국가에 판매하지 않겠다”고 언급하면서 공급망 회복 기대감은 다시 불확실해졌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산업의 핵심 가치가 ‘글로벌 효율성’에서 ‘공급망 복원력’과 ‘지속가능성’으로 이동할 것으로 본다. 고 연구매니저는 “제조는 비용이 아닌 경쟁력의 무기가 되고 있다”이라며 “기업들은 소재 재활용, 구형 칩 리사이클링, 지역 다변화를 통해 새 시대의 경쟁 구도를 맞이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국내 AI·반도체 생태계가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국내 제조·설계·소재 등 가치사슬 전반을 강화하고, 불확실한 외부 변수에 대비한 대체경로 확보가 필수"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