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니 가을 느낌이 물씬 납니다.
늦여름 무더위가 꺾이자마자 밖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죠. 연휴 내내 흐릴 줄 알았던 하늘이 개자마자 도심 곳곳의 핫플레이스도 인산인해였는데요. 특별한 외출을 감행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러닝화를 꺼내 신고 새로 장만한 러닝 조끼를 개시합니다. 주말엔 가까운 산으로 향하거나 밤공기가 선선해지면 텐트를 펴는 사람들을 통해 계절의 변화가 체감되곤 합니다.
요즘 이런 움직임을 설명하는 용어도 있습니다. 바로 '제철코어'. 놈코어, 고프코어처럼 패션에 국한돼 있다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어떤 계절을 보내고 있는지 말하는 트렌드인데요. 계절을 배경이 아닌 주인공으로 삼는 요즘 트렌드, 뭔가 특별한 지점이 있습니다.

얇은 랩스커트, 토슈즈, 리본으로 대표되는 발레코어, 아웃도어(야외활동) 의류를 일상에서 스타일링하는 고프코어처럼 유행은 통상 어떤 '룩'으로 형성됐습니다.
제철코어는 조금 다릅니다. 입거나 신는 방식이 아니라 사는 방식에 가까운데요. '제철'이라는 말 그대로, 지금 이 계절의 공기·빛·온도·소리 같은 감각의 리듬을 즐기는 태도를 말하죠. 패션의 영역을 넘어 일상 전반에서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느낄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지죠.
아웃도어 스포츠가 요즘 큰 관심을 받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무더위나 한파 속에서는 마냥 즐길 수 없는 야외 운동을 가을에 부지런히 즐기는 이들이 숱한데요. 러닝과 등산, 캠핑이 특히 주목받고 있습니다.
달리기가 취미 생활로 조명받고 있다는 건 이미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도심 곳곳에서 머리를 질끈 묶은 채 열심히 달리는 러너들을 쉽게 볼 수 있고요. 마라톤 등 각종 달리기 대회는 신청 접수로만 홈페이지가 마비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죠.
10일 마라톤 정보 포털 '마라톤 온라인'에 따르면 올해 등록된 대회는 489개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20년 307개, 러닝 열풍이 시작된 지난해 394개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죠.
등산에 대한 관심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러닝에 러닝 크루가 있다면 등산에도 등산 크루가 있는데요. 지역 기반의 운동 커뮤니티에 참여하면서 소속감과 연대감을 만족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가을이면 산 곳곳에 물드는 단풍까지 즐길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데요. 인왕산, 아차산, 북악산 등은 도심 핫플레이스와도 멀지 않고 초보 등산 코스도 마련돼 있어 젊은 등산객들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캠핑도 마찬가집니다. 한국관광공사의 '캠핑 이용자 실태조사' 자료에 따르면 국내 캠핑 인구는 2021년 523만 명에서 2023년 634만 명으로 늘었습니다. 연간 캠핑 소비 규모 역시 2021년 6조3000억 원에서 2023년 6조9000억 원으로 증가했죠.
특히 연령대가 낮을수록 글램핑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직접 텐트를 치고 숙박하면서 휴식하는 일반적인 캠핑과 달리 글램핑은 설치돼 있는 텐트를 대여해 야영하는 게 특징인데요. 일반적으로 취사도구, 침구 등을 제공하는 곳이 많아 음식만 준비하면 된다는 간편한 장점이 있습니다. 텐트부터 침낭, 조명 등 각종 용품을 구매해야 하는 캠핑에 비해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캠핑 감성을 즐길 수 있어 인기가 좋죠.

제철코어를 뒷받침하는 건 '지금 즐기지 않으면 놓친다'는 인식입니다. 나가서 놀기 좋은 날이 이어지는 봄·가을은 순식간에 지나가곤 하니까요.
'지금 이 계절을 즐긴다'는 태도는 소비 방향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계절을 맞이하는 방식은 활동뿐만 아니라 옷차림으로도 이어지고 있는데요. 노스페이스부터 살로몬, 아크테릭스, 새티스파이, 오클리 등 아웃도어 전문 브랜드들이 주목받고 있는 데다가 기존 패션 브랜드들에서 하이킹, 러닝 등을 콘셉트로 한 새 라인을 론칭하는 일도 잦죠.
유통 업계도 이 같은 흐름을 놓치지 않습니다. 프랜차이즈 카페들은 가을을 맞아 매년 밤, 고구마, 무화과 등을 활용한 시즌 메뉴를 앞다퉈 내놓곤 하죠. 가을 한정 음료인 스타벅스의 블랙 글레이즈드 라떼로 가을을 체감한다는 팬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지난달 17일 재출시 된 블랙 글레이즈드 라떼는 일주일 만에 120만 잔 넘게 팔리면서 굳건한 인기를 입증했습니다.
대전 대표 빵집 성심당에서도 가을이면 돌아오는 메뉴가 있습니다. 진한 밤의 고소함과 크림의 달콤함이 어우러진 알밤시루, 알밤롤인데요. 성심당은 매년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망고, 무화과, 생귤 등 계절과일을 이용한 시루 시리즈를 출시하면서 인기를 끕니다. 계절에 맞는 원물 재료를 쓴 제품은 단가가 결코 낮지 않지만 소비자 만족도가 크죠. 한정판 전략과 온라인상 확산력이 맞물리면서 구매 전환율과 브랜드 충성도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패션·출판 업계에서도 가을 중심의 큐레이션을 선보이는데요. 가을이면 떠오르는 스웨이드, 브라운 컬러로 추천 상품 리스트를 꾸리거나, 가을 연휴에 읽기 좋은 도서를 정리해놓는 식입니다.

제철코어는 단순한 유행이라기보단 지친 일상 속에서 속도를 조절하려는 움직임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는 SNS 피드, 마이크로 트렌드 속에서 살고 있죠.
반면 계절은 긴 호흡으로 돌아오는데요. 그래서일까요? 최근엔 이런 느린 리듬 속에서 마음의 기준점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뚜렷합니다. 봄에는 벚꽃 구경을 하고요. 여름엔 발랄한 토마토 코어로 무더위를 버텨보죠. 가을엔 야외활동에 나서면서 시원한 공기를 만끽하고요. 겨울엔 붕어빵으로 꽁꽁 언 손을 녹이곤 합니다.
젊은 세대가 계절 한정 상품을 즐긴다는 점은 여러 조사 결과로도 증명됐습니다. 일례로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지난여름 신흥 강자로 등장한 멜론을 중심으로 소비자 연령·성별 구매 패턴을 분석한 결과, 젊은 세대는 새로운 맛과 한정 상품의 희소성에 적극 반응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멜론맛 관련 상품 연령별 구매액은 20대 이하 소비자 사이에서 가장 큰 폭으로 증가했습니다. 20대 이하 남성은 전년 동기 대비 243.8%, 20대 이하 여성은 221.5% 늘면서 다른 연령대를 크게 앞질렀죠.
경제 상황 역시 제철코어의 확산을 뒷받침합니다. '플렉스(Flex)' 열풍이 사그라들고 작지만 확실한 만족을 주는 일상형 소비가 자리 잡은 건데요. 여기에 이상기후가 일상화되면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계절의 순간을 기록하고 소비하려는 사람들의 욕구를 부채질했습니다. 봄과 가을 체감 기간이 점차 짧아지는 걸 감안하면 고개가 끄덕여지죠. 제철 과일, 계절 스포츠 등 '지금 아니면 못 즐기는 트렌드'가 꾸준히 조명받는 이유입니다.
결국 제철코어는 유행을 넘어 삶의 리듬을 되찾으려는 세대의 방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요.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도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 사람들이 부지런히 계절을 만끽하는 배경이 아닐까요. 이번에도 짧을 가을, SNS 피드를 채울 각종 제철 인증샷이 기대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