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프? 폼 떨어진 브랜드 아냐?
한때 전 세계적인 열풍이 일었던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베이프(BAPE). 시간이 지나면서 유행의 중심에서 비켜난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요즘 이 브랜드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달 X(옛 트위터)에서는 지하철 좌석에 앉아 있는 한 시민의 무릎 위에 자신의 것과 똑같은 베이프 가방이 놓여 있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 웃음을 자아내며 높은 조회 수를 기록했는데요. 이후 사진에 찍힌 시민이 '사실은 나도 상대를 의식했다'는 취지로 자신의 시점에서 상대의 베이프 가방을 찍은 사진을 공유하며 '본인 등판'해 웃음을 더한 바 있습니다.
이들 게시글 외에도 베이프 제품이 여기저기서 출몰하고 있는데요. 베이프의 폼이 다시 돌아온 걸까요?

베이프는 1993년 일본 도쿄 하라주쿠에서 디자이너 겸 프로듀서 니고(NIGO)가 만든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입니다.
니고의 이름은 일본 스트리트 패션 시장에서 빠질 수 없습니다. 히로시 후지와라를 중심으로 한 일본 스트리트 패션 출범기부터 맹활약한 인물인데요. 그가 창립한 베이프는 2000년대 전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바 있죠. 스트리트 웨어와 하이엔드 패션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패션계 상징적 존재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A Bathing Ape in Lukewarm Water.' 직역하면 '미지근한 물에 목욕하는 원숭이'입니다. 일본 속담에서 유래된 이 표현은 풍요 속에 안주하는 젊은 세대를 풍자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980년대 일본은 경제성장의 전성기를 맞은 바 있죠. 국가와 지방은 재정 흑자를 이어갔고 소비자물가도 안정돼 '풍족' 그 자체인 상황이었습니다. 다만 1990년대 들어서는 거품이 급격히 꺼지면서 부동산과 주식 가격이 말 그대로 폭락, 수많은 기업과 금융기관이 부실 채권에 시달리거나 도산했습니다. 일본은 10년 넘게 0%의 경제 성장을 기록했죠.
침체와 불안이 확산한 만큼 사회 분위기도 얼어붙었습니다. 청년층 사이에서도 안정과 체제 순응이 강조됐는데요. 베이프의 창립 시기는 1993년. 니고는 당시 일본 사회 문제와 분위기를 아이러니한 미학으로 풀어 브랜드 이름에 담아냈죠.
브랜드 얼굴로는 TV 시리즈 '혹성탈출'에 나오는 유인원 이미지를 내세웠고요. 밀리터리 패턴에 캐릭터 감성을 더한 독보적인 카모플라주 패턴, 후드 모자까지 지퍼가 연결된 '샤크 후디', 대표 스니커즈 라인인 '베이프스타' 등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강렬한 인상의 상품들을 연달아 출시, 한정판 전략까지 더하면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퍼렐 윌리엄스, 칸예 웨스트(예) 같은 힙합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으로 글로벌 무대에도 안착했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그룹 빅뱅, 지코, 도끼 등 힙합에 기반을 둔 스타들이 즐겨 입으면서 '힙'한 이미지를 구축했죠.

다만 베이프가 꾸준히 인기를 끌어온 건 아닙니다.
2000년대 중반 폭발적인 인기에 급성장했지만 희소성과 품질 유지를 위해 생산을 제한하는 방침으로 수요를 충족하지 못했고, 경영 부담까지 더해지면서 적자도 떠안았죠.
니고는 2011년 베이프 지분 90%를 홍콩 의류 브랜드 I.T에 매각했고요. 이후 유럽계 투자사인 CVC 파트너스가 베이프를 인수, 니고의 경영 참여도도 줄어들었습니다. 결국 2013년 니고는 베이프를 떠났는데요. 이후 베이프는 카모 패턴만 수없이 찍어내며 '양산형 브랜드'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았죠. 특히 짝퉁 문제에도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이에 국내를 포함해 아시아권에서는 한때 '한물 간 브랜드' 오명까지 써야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분위기가 또 뒤집혔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Y2K 트렌드가 돌아오면서 1990~2000년대 감성을 품은 베이프의 아이템들이 다시 빛을 본 건데요. 카모 패턴부터 샤크 후디 같은 상징적 아이템은 쿨한 감성을 덧입었죠.
뉴진스를 필두로 에스파, 아이브, 투어스, 라이즈, 하츠투하츠 등 K팝 아이돌 그룹도 이 열풍에 불을 지폈습니다. 지난해부터 속속 베이프를 착용한 모습을 공개, 팬들의 눈길을 끌었는데요. 이들의 사복·무대 의상은 인스타그램과 틱톡, X, 유튜브 등을 통해 빠르게 퍼지며 바이럴 됐죠.
콜라보 전략 역시 효과적이었는데요. 산리오 협업으로 귀여운 캐릭터와 스트리트 감성을 결합했고, 네이버후드와는 실용적인 윈터 캡슐 컬렉션을 내놨죠.
국내에서는 코로나19 엔데믹 이후 일본 여행 수요가 늘고 엔저(엔화 약세) 현상까지 겹쳤던 상황도 베이프 열풍에 한몫 했습니다. 일본 현지에서 베이프 매장을 방문해 직접 구매한 경험이 소비자들 사이에 퍼지며 브랜드 친밀감이 강화됐고, 국내 인기에 다시 불을 붙인 거죠.
Y2K 트렌드, K팝 신, 콜라보와 일본 현지 경험까지 다층적으로 맞물린 결과가 베이프 리부트의 배경인 셈입니다.
베이프 인기에 힘입어 카모 패턴도 이번 시즌 주요 키워드로 떠올랐습니다. 12일 무신사에 따르면 무신사 온라인 스토어 검색량 데이터 분석 결과, 지난달 '카모'와 '카모플라주' 키워드의 합산 검색량은 전년 동기 대비 47%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베이프는 무신사에 입점한 6월 18일부터 이달 8일까지 무신사 스토어 전체 검색어 순위 20위권 내에 오르며 높은 화제성을 입증하기도 했죠.
저렴하게 베이프 감성을 즐기는 방법도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바로 베이프와 협업한 일본 잡지를 구매해 '부록'을 손에 넣는 건데요. 베이프는 잡지와 손잡고 가방, 지갑 등 부록을 제작한 바 있는데, 이게 또 질이 괜찮다는 평이 이어집니다. 잡지 부록을 중고거래 플랫폼, 해외 쇼핑몰 직구(직접 구매) 등을 통해 구하는 이들이 적지 않죠. 품절 한 달 넘게 배송을 기다렸다는 후기도 심심찮게 발견됩니다.

최근 베이프는 굵직한 협업을 통해 존재감을 강조해왔습니다.
2023년에는 아디다스와의 20주년 파트너십을 기념하는 캠퍼스 80s, 스탠스미스 협업을 선보였는데요. 베이프 30주년과 맞물려 '전통의 아디다스'와 '스트리트 감성'이 만난 장면이었죠. 지난해에도 아디다스 오르케트로를 베이프 감성으로 재해석한 협업 스니커즈가 출시됐습니다.
올해 1월에는 네이버후드와의 겨울 협업으로 아우터 컬렉션을 내놨고, 4월엔 아디다스 슈퍼스타 팩을 내놓으며 카모 엠보싱과 골드 디테일, 양발 비대칭 디자인을 접목한 한정판을 출시했습니다. 6월엔 아웃도어 퍼니처 브랜드 헬리녹스 15주년을 맞아 아웃도어 컬렉션을 선보였죠.
이어 이달엔 프레데터 엘리트 텅 FG, F50 엘리트 등 축구화 컬렉션으로 스트리트 웨어와 스포츠의 결합을 보여줬는데요. 9월엔 스타벅스 코리아와 손잡고 '베이비 마일로' 굿즈 출시를 예고해 눈길을 사로잡았죠.
반응도 뜨겁습니다. 26일 한정판 거래 플랫폼 크림에 따르면 아디다스 x 베이프 오르케트로 스니커즈는 정가 대비 230% 이상 오른 33만3000원에 거래되고 있고요. 올해 4월 출시된 아디다스 x 베이프 티셔츠 역시 160%가량 오른 13만 원에 거래 중입니다.
스타벅스 코리아와의 협업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습니다. 깜찍한 베이비 마일로가 스타벅스 바리스타로 변신, 코스터와 키링에 등장했는데요. 제조 음료 포함 2만5000원 이상 구매 시 베이비 마일로 코스터 1종을 선착순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이미 재고가 동난 매장도 숱할 정도의 인기입니다. 벌써 중고거래 플랫폼에서는 이 '무료' 코스터가 1만 원대 안팎의 가격으로 거래되는 중이죠.
오늘(26일)부터는 두 가지 종류의 키링을 판매합니다. 다음 달 5일까지 어텀 프로모션 음료 4종 중 1종과 함께 1만6900원에 구매할 수 있습니다.
패션에서 라이프스타일까지 무대를 넓히는 베이프인데요. 브랜드의 핵심 니고가 빠진 이후 활발한 협업을 통해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하려는 노력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베이프는 다시 한번 '품절 공식'을 증명해내고 있습니다. 아디다스에서 스타벅스까지, 전혀 다른 무대와 만남을 성사시키면서 단순한 패션 브랜드를 넘어 문화 아이콘으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중인데요. 과거의 향수에만 기대는 게 아니라, 지금 세대의 취향과 소비 습관을 정확히 겨냥한 결과로 해석됩니다. 다음 협업의 무대는 또 어디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