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분리 완화 논란…인플레이션 우려도 계속돼
준비자산 100% 현금·국채 보유 의무화 추진
CBDC와 민간 스테이블코인 역할 분담도 과제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규제 당국이 제시한 높은 장벽들을 넘어야 한다. 한국은행이 요구하는 '만장일치' 동의 확보부터 시작해 금산분리 원칙 적용 범위, 준비자산 100% 보유 의무, 자금세탁방지(AML) 체계 구축까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특히 한은이 제기한 인플레이션 우려와 통화정책 무력화 논란을 둘러싸고 정치권과 업계는 반박이 이어지는 모습이다. 한은은 중앙은행 통제를 벗어난 유사통화 공급 확대를 경고하지만, 정치권과 전문가들은 "새로운 통화 공급이 일어나지 않는다"며 맞서고 있다. 정부와 국회는 10월 통합안 마련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각 부처와 업계의 입장차가 커 조율 과정에 진통이 예상된다.
유상대 한국은행 부총재는 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진행된 ‘원화 스테이블코인, 금융혁신의 미래를 열다’ 토론회’에서 "관련 기관 만장일치 합의가 필요하다"며 "미국도 규제가 없는데 한국은 더 강력한 심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업계는 이를 '사실상 발행 금지'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은이 발행 안정성을 강조하는 배경에는 인플레이션 우려가 자리잡고 있다. 고경철 한국은행 전자금융팀장은 지난달 23일 서울 여의도 자본시장연구원 정책토론회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발행돼 시장에서 실제로 가치가 부여되기 시작하면,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구조가 나타날 수 있다"며 "이 과정에서 중앙은행이 통제할 수 없는 유사통화가 만들어질 수 있고, 이는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고 팀장은 시뇨리지(발행이익) 문제도 제기했다. "넓은 개념의 시뇨리지를 보면, 준비자산이 수탁기관에 있더라도 운용수익은 발행사에게 귀속된다. 미국 테더 사례를 봐도 막대한 영업이익을 기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원화 스테이블 코인 입법을 추진 중인 정치권에선 한은의 입장에 맞서고 있다.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스테이블코인은 기존 자산과 1대 1로 교환되기 때문에 새로운 돈이 발행되는 것이 아니며, 유동성은 그대로 유지된다"며 "한국은행의 주장은 실증적 근거도 이론적 뒷받침도 없는 괴담 수준의 주장"이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민 의원은 7월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경제는 민주당, 코스피5000시대' 토론회에서도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글로벌 디지털 금융 전략의 핵심 과제"라며 "법적 근거와 인허가 제도를 정비해 시장 불확실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형구 한양대 교수도 '디지털원화 시대 개막' 포럼에서 "스테이블코인을 구매할 때 현금을 주고 코인을 사는 것이므로 통화량이 변하지 않으며, 발행사는 받은 현금으로 국채 등 안전 자산을 매입한다"며 "경우에 따라 한국은행 역레포에 예치해 오히려 통화량이 줄어들 수 있다. 인플레이션 우려는 침소봉대 수준"이라고 반박했다.
강 교수는 "한국은행이 레포 금리·헤어컷 조정을 통해 스테이블코인 유통량을 조절할 수 있는 표준 프레임워크를 제공하면, 발행자들은 안정적으로 발행하고 한은은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안도걸 민주당 의원은 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진행된 법안 설명회에서 "인플레 우려는 너무 멀리 간 이야기"라며 "스테이블코인 발행하면 그만큼 현금이 은행에 묶이고 국채 등 고유동성 분야에 한정되기 때문에 통화 창출력은 상당히 제한된다"고 지적했다.
금산분리 완화 논란도 뜨겁다. 8개 은행 컨소시엄은 은행법상 비금융회사 지분을 15% 이하로만 보유할 수 있어 제약이 크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진행된 법안 설명회에서 "네이버 파이낸셜이 발행하여 자체 플랫폼 내 사용되는 것은 발행·유통 충돌 아니다"라고 밝혔다. 신상훈 연세대 객원교수도 같은 자리에서 "스테이블코인 거래 플랫폼 구축 시 발행과 유통이 동시 발생한다"며 금산분리 적용 범위를 명확히 했다.
안정성 확보 문제의 또 다른 관문은 준비자산 관리가 꼽힌다. 현재 국회에서 추진 중인 모든 법안은 준비자산 100% 이상 보유를 의무화하고 있다. 김현정 의원은 이날 금융투자협회에서 진행된 토론회에서 개회사를 통해 "이용자 상환 보장 위해 우선상환청구권·예보 지원 조치 도입했다"고 설명했다. 신상훈 교수는 4일 법안 설명회에서 "준비자산은 현금·요구불예금·1년 이내 국공채로 구성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자금세탁방지(AML) 체계 구축도 필수 관문이다. FATF '트래블룰'에 따라 100만 원 이상 거래 시 송신자와 수신자 정보를 의무적으로 수집·전송해야 한다. 신상훈 교수는 "발행인 등에 대해서는 특금법 개정을 통해 규율하는 것이 적정하다"고 밝혔다.
한국은행 CBDC '프로젝트 한강'과 민간 스테이블코인의 역할 분담도 쟁점이다. 문철우 성균관대 교수는 이날 금융투자협회 토론회에서 "프로젝트 파인으로 CBDC·토큰화 시장에서 실시간 통화정책 실행 가능하다"며 "민간 스테이블코인이 광범위하게 유통되더라도 중앙은행이 정책 효과를 유지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강일 의원은 이날 토론회에서 "외국 메인넷 의존 시 데이터 주권 우려된다"며 "코리아블록체인 구축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논란들을 종합하면 10월 금융위원회가 낼 정부안은 한은의 우려를 일부 수용하면서도 혁신을 완전히 막지 않는 절충안이 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한은이 요구한 '만장일치'는 받아들여지기 어렵지만, 한은에 실질적 검토권과 의견 제시권을 부여하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을 전망이다.
준비자산 100% 보유 의무는 유지되지만, 운용 범위도 한국은행 역레포나 단기 국채로 제한해 통화량 증가 우려를 해소할 전망이다. 강형구 교수가 제안한 '한은 주도 표준 프레임워크'가 일부 반영돼, 한은이 레포 금리 조정을 통해 간접적으로 스테이블코인 유통량을 조절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될 가능성도 있다.
금산분리 원칙은 단계적으로 완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초기에는 은행 중심으로 발행을 허용하되, 파일럿 테스트 결과를 보고 점진적으로 핀테크 기업에도 문호를 개방하는 방식이다. 자본금 요건은 10~20억 원 선에서 결정되고, 발행 총량 제한이나 용도 제한 등 추가 안전장치가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