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뱅크 논란 해소 위해 성실상환자 인센티브 강화를

새 정부의 정책들이 하나둘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이재명 정부가 공언한 대대적인 정부조직개편안은 이번 주 내로 얼개가 잡힐 예정이다. 금융당국은 수술대에 올라있는 곳 중 하나로 금융위원회 폐지부터 자본시장감독원 신설 등 다양한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이재명표’ 채무탕감 정책도 구체화했다. 도덕적 해이 우려 등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학계, 정치권 모두가 한목소리로 동의하는 지점이 있다. 조직 개편, 채무조정 프로그램 등 새 정부의 정책을 통해 ‘금융소비자 보호를 강화하자’는 것이다.
정대 한국금융소비자학회장(국립한국해양대학교 해사법학부 교수)은 최근 이투데이와 만나 “금융소비자 보호의 본질은 금융시장에서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실질적 평등을 구현하는 것”이라며 “특히나 정보의 비대칭이 큰 금융시장에서는 약자들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금융소비자 보호를 강화하는 정책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정 회장이 제16대 회장으로서 올 3월부터 몸담은 한국금융소비자학회는 2010년 설립된 사단법인이다. 금융소비자보호에 관한 기초, 응용 연구를 수행하고 이를 기반으로 구체적인 정책, 금융법제 발전방안 등을 제안한다.
설립 후부터 현재까지 총 26회의 학술대회를 열고 금융감독구조의 개혁, 금융교육, 서민금융, 가상자산 등 금융소비자 보호를 위한 다양한 정책 과제를 연구, 논의해왔다. 금융소비자보호법과 개인채무자보호법 제정 과정에 의견을 제시하는 등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한국금융소비자학회는 민간 금융사의 후원이나 지원을 받지 않는다. 학회장은 민간 금융사의 사외이사직을 맡아서도 안 된다. 이는 학회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다. 이 같은 학회 원칙을 이어가고 있는 정 회장의 임기는 내년 3월까지다. 정 회장은 임기 내 △금융감독구조 개혁 △포용금융 △디지털자산 금융소비자 보호 근거 마련 등의 주제로 학술대회 및 세미나를 개최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정 회장은 금융감독구조 개편과 관련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금융소비자보호 기능을 분리해 ‘금융소비자보호원(금소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금감원 내에 금융소비자보호처를 두고 있는 기존 형태로는 금융소비자보호 기능을 강화하기 어렵다”며 “따로 분리해 검사 기능 등 권한을 더 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새 정부 정책 기조와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국정기획위원회에 따르면 정부는 금융소비자 보호를 강화하기 위해 금감원 내부 조직인 금융소비자보호처를 분리해 금소원을 신설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 중이다. 금소원에서 금융소비자보호법, 대부업법,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 등에서 정한 업무를 담당하는 방식이다. 금소원 신설 등 금융당국 조직개편안은 조만간 공개될 가능성이 크다.
정 회장은 “금소원 신설은 학회가 설립됐을 때부터 추진하고자 했던 숙원 사업 중 하나”라며 “현재 여러 개로 쪼개져 있는 금융소비자 관련 조직의 역할을 한데 모아 콘트롤타워로 기능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포용금융’도 정 회장이 집중하는 정책과제 중 하나다. 코로나19 사태로 소상공인·자영업자의 채무가 커진 것에 대해 정부가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시각에서다. 정 회장은 “단순히 돈(대출)을 내준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면서 “빚이 많아지게 되면 빚을 갚는데 다 쓰고 소비를 안 하기 때문에 내수 경제 회복이 더욱 어려워진다”고 지적했다.
정 회장은 이러한 이유로 최근 정부가 발표한 이른바 ‘배드뱅크’를 ‘코로나19 사태의 후유증을 치유할 장치’라고 평가했다. 배드뱅크는 장기 연체 채무자 113만 명의 빚을 탕감하는 채무조정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이르면 올 3분기 설립될 전망이다. 다만 ‘빚을 갚지 않고 버티면 정부가 탕감해줄 것’이라는 잘못된 기대감을 줄 수 있다는 도덕적 해이 논란과 성실히 빚을 갚은 사람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정 회장은 논란 해소를 위해 확실한 인센티브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정부가 발표한) 배드뱅크 청사진의 경우 성실상환자에 대한 인센티브가 분명하지 않다”며 “성실 상환자가 다시 대출을 받고자 할 때 신용점수를 대폭 개선해주거나 세재 혜택을 주는 등의 이득이 있어야 빚을 갚으려 노력할 것이고 채무조정 프로그램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채무자의 직업이나 돈을 빌린 창구 등을 고려하지 않아 적절한 핀셋 지원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쌓여 있는 채무가 많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일일이 차주를 분석해서 조정해 주려고 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며 “장기 연체자에 대한 빠른 구제가 필요하다는 측면에서는 적절한 판단”이라고 했다.
정 회장은 포용금융 정책 대상자 중에서도 특히 20~30대 청년과 50대 장년층에서 개인회생, 파산이 늘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회생법원의 ‘2024년 개인회생사건 통계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20대 개인 회생신청 비율은 지난해 들어 소폭 감소했지만 가상화폐, 주식투자 등의 영향으로 2021년부터 2023년까지 꾸준히 증가세를 보였다. 채무자 비율은 지난해 기준 50대가 20.9%, 60대 이상이 8.5%로, 두 연령대 모두 전년 대비 증가했다.
정 회장은 “20대는 잘 몰라서, 50대는 은퇴 이후 퇴직금 사기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며 “청년층과 고령자에 대해 더욱 세분화한 맞춤형 금융교육, 서비스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금융소비자학회는 ‘포용금융의 정책 과제 : 금융소비자보호와 경제활성화’를 주제로 이달 9일 열리는 하계학술대회에서 정 회장이 언급한 내용을 더욱 심도 있게 다룬다. 구체적으로 신정부의 출범과 포용금융의 과제·고령소비자 맞춤형 포용금융정책·불법사금융 피해 보호를 위한 제도 개선안·개인회생 및 파산의 법제도적 과제 등 총 6개 주제가 논의 테이블에 오른다.
정 회장은 “채무조정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관련 정책 설계뿐만 아니라 금융소비자 연구와 금융교육도 중요하다”며 “특정 연령대가 왜 빚을 지게 됐는지, 어디에서 돈을 주로 빌리는지 등에 관한 구체적인 사례연구와 분석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번 하계학술대회에서도 강조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 회장이 임기 중 힘을 싣고자 하는 또 다른 연구과제는 디지털자산 부문의 소비자 보호다. 현재 학회에서는 금융소비자보호법에 디지털자산 관련 근거 규정을 만드는 방안에 관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이를 주제로 한 동계학술대회는 연말에 열릴 예정이다.
정 회장은 “산업 육성도 중요하지만 디지털자산 이용자는 현재 금융소비자보호법의 적용을 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분명히 금융소비자 보호 측면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가상자산시장에서의 금융소비자 보호를 위한 법 제도적 개선방안이 마련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금소원을 신설하면 원내에 디지털자산 담당 섹터를 둬 업무를 관리하는 방식을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