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학계·정부 협업, 사즉생 각오로 개발
세계 10번째 성공… 韓 ICT 혁신 출발점
2025년 세계는 AI 패권전쟁 중
韓, 자본·기술·인재 열세 데자뷔
‘안보·경제주권 선점’ 다시 도전

대한민국이 통신 강국으로 도약한 여정은 “실패하면 사표를 내겠다”던 한 인물의 결연한 다짐에서 시작됐다. 전화기 한 통 놓기조차 어려웠던 1981년 9월, 당시 오명 체신부 차관은 최순달 한국전기통신연구소(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ETRI) 소장을 찾아 물었다. “240억 원이 투입되는 국산 전자교환기(TDX) 개발, 진짜 가능합니까?” 최 소장은 주저 없이 답했다. “실패하면 사표를 내겠습니다”라고 했다. 이 결연한 대답은 개인의 책임감을 넘어 우리의 기술 자립을 향한 전환점이자, 국가 연구개발(R&D) 전략의 분수령이 됐다.
당시 TDX 국산화는 무모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정치권과 시민사회는 “차라리 한강 다리를 하나 더 놓자”고 비판했다. 외국 교환기 업체들의 조직적인 방해 공작도 이어졌다.
전기통신연구소의 전체 연간 연구개발비가 24억 원에 불과하던 때라, 단일 기술 과제인 TDX 개발에 240억 원의 예산을 배정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이 단일 기술 과제에 최종적으로 투입된 예산은 1076억 원, 정부의 강력한 결단과 전폭적인 지원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프로젝트였다. TDX는 단순한 기술 개발에 그치지 않았다. ETRI를 중심으로 삼성·LG·대우 등 주요 대기업과 학계·정부가 하나로 뭉친 ‘산·학·연·관 협업체계’가 작동한 최초의 국가 기술 프로젝트로 역사에 기록됐다.
이 구조적 협업은 미국·일본·프랑스에 이어 세계 10번째 전자교환기 국산화로 ‘1가구 1전화’ 시대를 열었다. 수입에 의존하던 핵심 통신장비가 우리 손에서 만들어 지면서 반도체,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초고속인터넷 등 모든 ICT 혁신의 출발점이 됐다.
2025년. 우리는 또 다시 기술 패권의 갈림길에 서 있다. 미국과 중국은 수백조 원의 자본을 투입해 인공지능(AI)와 그래픽처리장치(GPU) 인재를 선점하고 있다. 유럽은 AI법을 기반으로 전략적 산업 구조를 재편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GPU 자원 부족 등 인프라와 기술 경쟁력이 한참 뒤처져있다.
오늘 우리가 AI 산업에서 직면한 문제는 과거 TDX 개발과 닮은꼴이다. 핵심 기술과 인재의 부재 속에서 국가 전략의 구심점도 여물지 못했다. 이재명 정부가 ‘AI 3대 강국 실현’을 1호 공약으로 내세우며 100조 원을 투입하겠다고 천명한 것은 위기 인식의 반영이다. 하지만 자본 투입만으로는 성과를 담보할 수 없다. 문제는 ‘어디에, 어떻게’ 투자할 것이냐는 전략적인 설계도다.
김영오 서울대 공과대학장은 최정예 AI 전문인력으로 구성된 ‘국가AI혁신연구원’을 설립하고, 박사급 인재 1000명을 선발, 연봉 5억 원과 주택을 제공하는 등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해야 한다고 했다.
이 모델은 본질적으로 TDX 개발 당시의 구조와 유사하다. 국내에 전자교환기 설계 능력이 부족해 미국에서 박사급 인재를 영입하고 정부가 자금을 조달하며 민간이 실행을 담당했던 삼각 협력 구조는 오늘날 LLM(초거대 언어모델) 등 국가 AI 플랫폼 구축에서도 그대로 요구되는 형태다.
AI는 더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 주권은 경제 주권이며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다. ‘소버린 AI(AI 주권)’가 글로벌 질서를 재편하는 키워드로 부상한 상황에서 정부의 강력한 결단과 전략적 전술이 성패를 가를 것이다. TDX 국산화는 민·관이 하나 돼 ‘기술 주권’을 실현한 한국 산업사에서 최초, 최대의 성공 사례다. 44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AI라는 새로운 기술 주권 전쟁터에 뛰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