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70년대 청춘을 적신 ‘원서머나잇’

입력 2023-12-1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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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남 영화평론가·계명대 교수

<‘사랑의 스잔나’, 1976년作>

지난 8월, ‘제19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초청돼 특별상영됐던 영화 ‘사랑의 스잔나’(1976)가 디지털 리마스터링돼 47년여 만에 재개봉(새해 1월 4일)된다. 이 작품의 국내 개봉은 필자가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던 1976년 7월이었다(허리우드극장, 17만 관객 동원, 그해 흥행 1위). 영화보다 먼저 주제곡인 ‘원 서머 나잇(One Summer Night)’이 도처에서 너무나 빈번히 흘러나왔고, 진추하의 브로마이드는 사춘기 소년들의 책받침으로 편재했었다.

개봉관에서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변두리에서 재개봉할 날을 기약했다. 그해 12월에 가서야 영화 2편을 동시 상영하는 변두리 재개봉관에 다시 걸린다는 사실을 알고 친구 세 명과 함께 토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당일 종례에서 담임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경고를 하셨다. “연말연시를 맞아 학생들의 탈선과 풍기문란 행위 근절을 위해 역내의 여러 학교 선생님들이 합동단속반을 꾸렸으며, 바로 오늘부터 집중단속에 들어갈 것이니, 주말이라고 공연히 우범지역을 배회하는 일 없이 곧장 귀가할 것!”

우리는 아랑곳없이 사전 계획대로 영화관에 달려갔다. 지금은 제목도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 지루한 영화 한 편이 지나가고, 마침내 기다리던 ‘사랑의 스잔나’가 상영됐다. 그새 마르고 닳도록 들으며 가사까지 전부 외웠던 주제곡 ‘원 서머 나잇’이 흘러나오는 장면을 보며 감격했고, 여주인공 ‘이추하(진추하 분)’가 대학 졸업식장에서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부르는 ‘Graduation Tears’, 그리고 그밖에도 ‘Tommy Tom Tom’, ‘생명지광(生命之光)’ 등 진추하가 직접 곡을 쓴 여러 노래들과 비운의 로맨스를 따라가며 영화에 흠뻑 빠져들었다.

마침내 세상을 떠나기 전, 한국에 와서 눈덮인 설원과 스키장을 보고 싶어 하던 추하의 소망대로, ‘국휘(이승룡 분)’는 그녀와 김포공항을 나와 서울을 거쳐 대관령(용평스키장)을 향해 달려간다. 극이 엔딩 시퀀스만 남겨 놓고 있던 시점이었다. 갑자기 티켓박스의 여직원이 뛰어 들어와 다급히 소리쳤다. “학생들! 단속반이에요!” 거의 즉각적이고도 동물적으로 우리는 각자 살길을 찾아 도망쳤고, 영사실 뒤로 난 필름 보관 창고와 간판 작업실을 거쳐 뒷문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오늘의 청소년들에게 ‘극장에서 영화보는 것이 탈선행위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뭐라고 답할까? 그러나 그땐 그랬다. 우리의 머리카락, 헤어스타일도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여성들의 옷차림마저도 때때로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국가가 관리’하던 시절이었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1997년에야 나는 비디오를 통해 이 작품의 마지막 시퀀스를 온전히 연결할 수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이 영화가 ‘러브스토리’(1970)에 너무나 큰 영향을 받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범아시아권 특급스타 진추하의 시장가치를 앞세운 ‘스타비히클(Star Vehicle·스타의, 스타에 의한, 스타를 위한) 영화’였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 영화에 대한 환상은 그렇게 깨졌다.

그러나 어떠랴. 너무나 미욱했던 그 시절, 세상만사에 두루 관심의 촉수를 드리우고, 도처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입더라도 그것을 치유하는 과정이 곧 경험이며, 각자의 내러티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세대는 동물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찾고 보고 누릴 것 마뜩잖던 부박한 세상의 변두리, 싸구려 동시상영 극장에서 돌아가는 어수룩한 영화 속 인물과 세상 모습마저도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간절했었다. 되새겨보니 그마저도 이렇게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이 글을 갈무리하려던 차에 영화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출연하며 1970년대 청춘스타의 대명사였던 라이언 오닐이 지난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이 이 글을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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